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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an 05. 2024

마음을 쓰는 시

사랑에 대하여 2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 무언가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불쑥 튀어나온 광고에 아무 고민 없이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는 것도, 관심을 요하는 현수막들을 외면하는 것도 참 쉽다. 그러나 절대 지나치지 못하는 것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냥 넘기는 문장을 오래 간직하거나, 아무도 기억 못 할 순간을 품고 있는 것처럼. 그렇기에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진은영은 이런 사랑을 가득 품은 시인이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라는 시인의 말과 함께 진은영의 세계는 시작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담는 것, 이것이 글이 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진은영의 시집이 유독 와 닿았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청혼>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 <그러니까 시는>


시집을 넘기자마자 마주할 수 있는 시. 가장 앞쪽에 수록되어 있는 <청혼>과 <그러니까 시는>를 통해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어떻게 시를 써야하는지, 자신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다고 이야기하며, 시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나아가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돌들의 동그란 무릎이라고 이야기한다. 시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결연한 마음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며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 <그날 이후>


내 짝은 입을 꼭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 <사실>


당신과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의 신념으로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 –한 노동운동가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던 진은영의 시선은 이내 소외된 이들에게 향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비롯해 오래 전 죽은 자신의 짝꿍, 노동운동가 등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이들을 다시 불러내어 시의 형태로 사랑을 전한다. 명확하고 명료한 언어로 이들의 아픔을 전달한다.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시작된 시는 어느새 세상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기차 바퀴가 끽끽, 마찰음으로 울렸다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신경을 써서 깊이 생각하거나 걱정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마음을 써서 세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 써내려간다.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은영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나’라는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과 시는 같다고 이야기했다. 시와 사랑을 동일시한 시인은 시의 형태를 빌려 명확한 수신자가 존재하는 편지를 부친다. 더 나아가 함께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이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건넨다. 슬플 애에 사랑 애를 덧대는 형태로.




by.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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