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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사랑과 현실의 간극

사랑에 대하여 3 :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를 읽고

<패배의 신호>의 주인공인 ‘루실’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무책임’이다. 소설 전반에서 나타나듯 ‘루실’은 ‘절정의 무책임’을 잃지 않은 인물이고, 성인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삶 자체를 무책임으로 일관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생활을 존속하게 하는 것은 쉰 살의 성공한 부동산 사업가이자 ‘루실’의 애인인 ‘샤를’이다. 그는 ‘루실’에게 물질적인 안전을 제공하며, 나아가 감정적으로도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샤를’이 바라보는 ‘루실’과 그녀가 되고 싶은 자신은 서로 일치를 이루며, ‘루실’로 하여금 ‘절정의 무책임’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미래를 기약하지 않고, ‘현재만이 그녀와 함께 달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클레르’가 주최한 파티에서 만난 ‘디안’의 연인, ‘앙투안’의 등장으로 인해 ‘루실’과 ‘샤를’의 관계는 위기를 맞게 된다. ‘루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앙투안’과 파티에 참석한 이들을 조롱하는 ‘웃음을 공유’하며 서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종국에 그들은 애인 몰래 육체적 관계까지 맺으며 ‘은폐의 기쁨’마저 향유한다. ‘루실’과 ‘앙투안’의 갈망은 점점 심화되고, 서로의 애인인 ‘샤를’과 ‘디안’의 존재는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하고 만다. 몇 번의 갈등 끝에 그들은 ‘쾌락’, ‘웃음’, 심지어는 ‘고통’으로도 맺어지며, ‘루실’은 ‘샤를’에게, ‘앙투안’은 ‘디안’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별을 맞이한 ‘루실’과 ‘샤를’의 대화에서 그는 ‘루실’이 가진 ‘모순’에 대해 지적하며, ‘앙투안’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예견한다. ‘샤를’의 말처럼 ‘루실’과 ‘앙투안’은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을 영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금전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샤를’과의 생활로 인해 습관이 되어버린 사교계와 허례허식들은 ‘루실’이 이전과 같은 자유롭고, 무책임한 삶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앙투안’의 제안으로 ‘레베이’라는 신문사에 취직하지만,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고는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둬버린다. 그녀는 ‘샤를’이 준 진주 목걸이를 팔아 회사를 다니는 시늉을 하며 ‘파리의 게으름을 남용한다’. 결국 ‘앙투안’에게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샤를이 아니라 포크너가 그런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이러한 ‘루실’의 모습에서 그녀가 가진 ‘모순’이 자명해진다. ‘샤를’과 ‘앙트완’은 ‘행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순수한 이기주의와 무심함’이 주는 매력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이렇듯 방종에 가까운 무위를 누리는 ‘루실’은 ‘앙투안’과의 생활로 인해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던 바깥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일부가 된 사교계의 습관과 가난한 현실의 괴리를 뒤로 하고 지리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루실’의 이러한 기질들은 결국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소설 전반에서 그녀는 돈의 가치를 부정해 왔다. ‘루실’은 ‘샤를’과 만나는 이유도 돈 때문이 아니라며 자신과 주위를 설득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샤를’의 재산이 필요한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루실’이 ‘앙투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이러한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그녀는 아이를 낙태하기로 결심하지만, ‘앙투안’의 가난으로 인해 정식 병원이 아닌 ‘인턴’의 손에 수술을 맡길 위기에 처한다. 이에 ‘루실’은 자신이 <야생 종려나무>의 여주인공과 같은 비극을 맞이할 것을 우려하여 ‘샤를’을 찾아간다. 소유욕으로 인해 ‘샤를’을 질투하는 ‘앙투안’을 뒤로하고, ‘루실’은 스위스 제네바의 병원에서 안전하게 낙태 수술을 받고는 ‘샤를’과 재회한다. ‘루실’은 ‘앙투안’의 집을 상기하며 그곳을 ‘지옥이 뒤얽힌 천국’으로 규정한다. 그녀는 ‘앙투안’과의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와 작별하고, ‘샤를’과 결혼하게 된다.

소설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루실’의 모습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인물이지만, ‘앙투안’과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샤를’과 결혼하면서 닫힌 미래에 도달하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퇴각의 북소리’, 즉 ‘패배의 신호’처럼 그녀는 이전에 추구하던 순간적인 향락을 뒤로하고, 안정적인 삶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클레르’는 ‘퇴각의 북소리’라는 언어를 칭찬하며 ‘프랑스’를 언급한다. 이는 소설의 초반부터 등장했던 ‘파리’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상기시킨다. 작중에서 ‘파리’는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사교계와 체면이 득실거리는 장소로 묘사된다. ‘루실’이 ‘앙투안’에게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장소도 ‘파리’를 벗어난 여행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파리’는 ‘루실’의 돌발적인 사랑을 방해하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파리’에 돌아와 일상을 살아감과 동시에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고 ‘샤를’과 함께했던 시간을 갈망한다. 결국 ‘파리’라는 장소가 가진 공간성이 그녀의 속물적인 속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어쩌면 ‘파리’는 현대의 도시, 더 나아가 물리적인 세계를 환유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과 현실을 대립적인 요소로 간주하곤 한다. 소설에서 ‘루실’이 그러했듯, 사랑과 현실의 간극은 현대인 모두가 마주하는 문제이다. 소설은 결말을 통해서 현실 앞에서 무릎 꿇은 사랑, 더 이상 물질적인 가치들이 범람하는 현시대에서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피력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조명한다. 어쩌면 <패배의 신호>는 초라하고 무력한 사랑을 직시하게 하며, 현실 속에서 잊혀가는 사랑에 대해 재고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by.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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