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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모두가 알아차린 신호

사랑에 대하여 3 :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를 읽고

루실과 샤를은 연인이다. 루실은 서른 살, 샤를은 쉰 살이고 루실은 샤를에게 모든 걸 의지한 채 현재만을 산다. 샤를은 루실을 사랑한다. 디안과 앙투안은 연인이다. 디안은 사십 대, 앙투안은 서른 살이고 앙투안은 디안의 집에서 산다. 디안은 앙투안을 사랑한다. 루실과 앙투안은 자신들의 피보호자들에게 오묘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서로에게 빠져든다. 결국 연인을 저버리고 함께한다.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보낸 뒤 현실의 지독함을 맞닥뜨린 그들은 고통까지 함께할 수는 없었다. 루실는 샤를에게 돌아가고, 앙투안은 나름 직업적 성공을 이룬다.

사실 이 요약 뒤로 쓰려던 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줄거리를 정리하며 원래의 말과 다른 생각이 시작되었다. 인물들의 사랑이 뒤죽박죽 튀어 나간 것처럼, 이제 이 글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인물들의 관계가 시작되는 곳은 프랑스의 사교계였다. 프랑스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사교계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어느 부분에서 사소한 공감대를 쌓고 이들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러나 인물들은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구 반 바퀴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뒤통수에 꽂힐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단순했던 줄거리가 바로 뒤를 노린 화살이었다.

이들을 둘러싼 배경을 조금 걷어내자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하고 공감했던 요소가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공유된 웃음이다. 지금까지 유지된 관계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로를 보고 웃는 관계는 없는 듯하다. 같은 걸 보고 동시에 웃을 수 있는 이들이 소중해진다. 이것 말고도 인물이 다른 인물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집을 한 번 읽어서 그런 건지 내 주변과 소설에 있던 사랑의 신호를 포착했다.

그렇다고 이런 신호에만 홀린 채 내 삶을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큰 박물관에서 한 전시실을 해설까지 읽어가며 둘러보면, 다음 전시실부터 시각적으로 인상 깊은 것들만 보게 되는 일은 허다하다. 사랑은 박물관보다 방대한 크기에, 깊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것이 품은 요소를 보고 놀라는 일도 지루해진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일 뿐이다. 하지만 부족한 인내심은 벌써 각종 설명에 지쳐 의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사랑이 뭐길래 인물들이 실리를 미뤄두고 택하는 것인지, 사랑의 시작은 꼭 강렬해야 하는 건지, 한 번 눈이 맞은 뒤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 따위의 질문 말이다. 서술자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루실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며 그런 인물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앙투안이라고 친절히 알려주기도 하고, 차마 인물이 내뱉지 못한 말도 숨기는 법이 없다. 행동과 행동 사이의 동기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여기서 부재한 것은 시작이다.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며 이따금 한계에 부닥친다. 이를테면 루실의 목소리를 빌려 샤를의 관대함과 다정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질문을 남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걸 아는 듯한 서술자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라도 생기면 이전의 확신은 허영으로 변모하기에 십상이다.

소설의 내용만 붙들고 툴툴댈 수도 없다. 이어지는 질문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지나가도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흔한 사랑의 과정을 왜 묘사했으며, 작가는 답이 없는 문제임을 인정했는데도 왜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는가? 많고 많은 질문의 마지막은 또 내게 향한다. 왜 이걸 읽고 있나. 이 질문에 당도하자 앞에 주욱 적어놓은 질문들이 민망해진다. 뻔하고 답이 없는데도 늘 남의 사랑을 구경하려는 나와 다른 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럽다.

소설은 우리에게 숨김이 없었지만, 한 트럭의 질문을 만들어버렸다. 한 번 눈에 띈 질문은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매달려 답하는 건 너무 어렵다. 작가는 이 불가능을 인정하고 소설을 마무리한 듯하다. 앙투안이 말한 퇴각의 북소리는 패배의 신호였다. 그 패배가 무엇에 대한 것이든 사랑의 신비를 결국 인정해 버린 것으로 읽고 싶다. 의문만 남긴 이 소설은 ‘패배의 신호’ 자체다.

아직은 사랑 탐구를 멈추지 않았는데, 결론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인 듯하다. 결국 나에게는 느낌만이 남는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 나만 모르고 있어서 걱정스러운 게 아니라 다들 모르는데 뭐가 대수인가 싶다. 그래서 덜 두렵다. 자신감에 충만한 채, 내 느낌에 충실한 채 이 소설과 사랑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by.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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