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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본질적 고독으로의 귀환

사랑에 대하여 3 :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를 읽고

프랑수아즈 사강의 시선은 예리하고 섬세하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서, 미묘한 공기의 흐름까지 묘사한다. 때로는 냉정하고 깔끔한 단문으로 정의 내리거나 비유와 수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자세하게 나타낸다. 루실과 앙투안의 사랑이 시작될 때, 그리고 사랑이 격화될 때, 끝내 사랑이 종결될 때까지 시종일관 날카로운 서술은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교 모임에서의 신경전과 숨 막힐 듯한 이해관계로 점철된 분위기까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미세한 분위기는 느낌의 차원에서 파악되는 것일 뿐,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강의 묘사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여러 풍광 속에서 나는 이러한 세밀한 공기의 흐름을 감지하면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더욱더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부유하지만 연로한 남자 샤를과 동거하면서 물질적인 자유를 누리며 무위의 삶을 사는, 젊고 아름다운 루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교계의 권력을 거머쥔 디안과 동거하는 앙투안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사랑의 격정에 속수무책으로 잠긴 루실과 앙투안은 고뇌와 방황을 거듭한 끝에 자신들의 파트너인 샤를과 디안을 떠난다. 이를 지켜보는 샤를과 디안은 상실의 고통에 직면하다가 끝내 그들과의 관계를 종료한다. 그러나 사랑의 풍랑에 휩쓸린 루실과 앙투안의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은 높다. 앙투안은 루실에게 샤를만큼의 물질적 자유를 제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루실은 이전처럼 자신이 추구하던 무위의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노동에 뛰어들지만 금세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불안과 질투가 근간이 되었던 앙투안과 루실의 관계에서 불신이 융기한다. 그리고 루실의 임신과 낙태,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경제적 비용의 문제는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 과정에서 샤를이 다시 틈입하며 결국 앙투안과 루실의 사랑은 끝이 난다. 루실은 다시 샤를의 곁으로 돌아가고, 앙투안은 노동에 전념한다. 이 둘은 재회하더라도 이전에 느꼈던 ‘퇴각의 북소리’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사랑의 ‘퇴각’이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패배의 신호는 1부 봄과 2부 여름, 3부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의 전조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포착해 낸 1부 봄의 비중이 가장 크다. 할당된 지면의 수뿐만 아니라, 번뜩이는 사랑에 대한 묘사가 가장 세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용하는 불안과 질투, 괴로움 등이 얽혀 있다. 사강은 복잡다단한 사랑의 레이어를 분해하고 이를 선연히 보여 준다. 사랑이 모든 감정들이 엉킨 집합체인 것을 인지하고, 이 얽힌 실타래의 실 한 올 한 올을 풀어낸다. 이후, 루실과 앙투안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져서 가장 찬란한 순간인 여름 또한 풍광을 아름답게 보여 주지만 그 분량은 짧다. 마치 사랑이 정점에 다다른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배치이다. 그리고 사랑이 점점 현실에 부딪쳐 소실되어 갈 때의 내용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복잡한 과정, 그리고 사랑이 최고점에 다다랐을 때의 순간들은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지만 정작 그 물리적 시간은 짧다. 특히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연상하는 낭만적인 지점들이 바로 사랑이 시작된 순간과 정점에 다다른 순간에만 응축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배치는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사랑에 대한 우리의 비대칭성은 사랑과 고독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으레 사랑의 긍정적인 부분들만 ‘사랑’이라 간주하듯이, 우리는 ‘사랑’을 상실했기에 ‘고독’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삶이라는 것은 권태와 무료와 지루함으로 점철된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게 삶을 살아간다. 이 고독은 본질적 차원이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남들과 같지 않기에 ‘나’인 존재이므로 고독하다. 그러나 타인과 연결되는 ‘사랑’의 순간을 통해 마치 ‘고독’이란 것이 해소되었다고 느낀다. 루실과 앙투안은 지리멸렬했던 일상에서 불꽃처럼 튀어 오른 사랑에 매료되고, 이 사랑을 통해서 보잘것없던 나날들을 새롭게 감지한 것처럼. 권태롭기만 했던 하루하루는 상대방에 대한 기다림과 갈급함으로 물들고, 구체적인 요소들은 휘발된 채 격정의 순간들만이 육체와 정신에 깃든다. 루실과 앙투안이 향유한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 버리는 절대적인 감정”(p.92)이었다는 문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사랑은 고독을 더 짙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실과 앙투안은 “몽유병 환자들처럼 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즉,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 지탱해 주었다.”(p.92) 즉,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온갖 불안과 번민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기에 타인이 부재한 시공간 속에서 나는 뼛속 깊이 시린 ‘고독’을 체감한다. 그래서 더욱더 사람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망한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을 전복하면 존재는 곧 부재를 뒷받침한다. 즉, 사랑하는 타인의 현존은 부재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결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고독했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고통이다.


“사람들은 점점 두려운 거예요. 늙는 게 두렵고,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렵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할까 봐, 삶이 지루해질까 봐, 자기가 지루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운 거죠. 늘 불안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거예요.” - p.86


이와 같은 루실의 대사는 사랑이 ‘고통’을 무화시키기보다는 ‘극화’시킨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랑’하는 ‘너’로 인해서 지루하고 무료했던 ‘나’의 일상은 화려한 빛깔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상실할까 봐, 혹은 ‘사랑’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며 가질 수 없을까 봐 늘 불안해진다. 그리고 끝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고독은 필연적인 인간의 운명이지만, 그것을 잠깐 망각하게 해 주는 사랑에 도취되어 지루함을 끌고 올 고독이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달아오른 것은 식기 마련이듯 정점에 다다른 사랑이 미끄러질 때, 우리는 점점 고독을 견디게 된다. 루실이 앙투안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즉,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수반하는 고통마저 수용한다. 앙투안은 “어쨌거나 넌 더는 행복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루실은 “너도.”라고 응수한 것처럼, 관계의 마지막에서 루실이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애당초 앙투안과 루실이 감지했던 심장의 두근거림, 그 “퇴각의 북소리”가 “패배를 알리기 위해 울리는 신호”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된 것처럼 다시 원초의 고독으로 복귀한다. 어쩌면 이 패배의 신호는 결국 고독으로부터 완전한 회피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본질적 고독에 대한 일시적 회피이며, 오히려 고독을 견딜 수 없으면서도 견딜 수 있게 하기에.

모든 들숨과 날숨에 신경을 쓰면 호흡 자체가 불편해지는 것처럼, 사랑은 모든 감각에 과민하게 반응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쉽게 들뜨고 쉽게 상처받는다. 섬찟한 사랑의 감정이 솟구칠 때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무화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사랑의 대상이 사라진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고독이 몰려온다. 그래서 사랑은 고독을 견딜 수 있게 하면서 고독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다가 결국 사랑이 완전히 소거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고독으로 돌아간다. 이 고독이 참을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며, 결국 삶이라는 것이 고독과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으레 사람들은 행복한 것이 삶의 기본 전제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불행이 삶의 밑바탕이며 행복은 섬광이다. 이러한 도식을 사랑과 고독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태이며, 고독한 것이 특수한 불행이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고독이 우리 삶의 디폴트이며, 사랑은 일회적인 사건이기에 특수한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와 같은 잔인한 삶의 논리를 모두 파악한 사람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하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감지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강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십 년 정도 늙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의 지리멸렬함을 견디고, 겨우겨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랑의 추동력. 그것이 삶 전반에 걸쳐서 반복될 것을 생각한다. 지겹다. 고통스럽다. 사랑이 선사하는 과민한 감각도 아프게 다가온다. 아주 뜨거운 물이 손에 닿으면 이상하게도 차갑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만을 향유하고 살아가기엔 우리 삶은 길고 지루하므로. 또 사랑이 번뜩이는 순간은 찬란하고 새롭게 다가오므로. 또 이와 같은 행위를 연거푸 반복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기대하고 싶지 않고, 쉽게 실망하고 싶지도 않으므로 사랑보다는 고독이 더욱 편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 더 안정적인 것처럼. 본질적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 보면 사랑의 파도에도 몸을 잘 가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by.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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