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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생을 앞서는 사랑

사랑에 대하여 4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책의 서두에 나오듯, <자기 앞의 생>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미친” 듯한 사람들, 주인공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랍인 ‘모모’는 매춘부의 자식을 맡아 기르는 유태인 ‘로자 아줌마’에게 위탁되어 어린 시절을 보낸다. ‘로자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과거를 가진 인물로 한밤중에 일어나 몰래 마련한 지하실의 소파에 누워 안정을 찾는 등, 그녀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서로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위안 삼으며 생활한다.


‘모모’가 흑인 여장남자 ‘롤라’를 “세상 사람들과 다른 데가 있기에 그녀를 무척 좋아한다”라고 말하듯, 이들이 거주하는 ‘벨빌’은 유태인, 아랍인, 흑인 등 여러 인종 및 사회로부터 배격된 이방인이 한데 모인 지역이다. ‘모모’에게 있어서 이곳은 일종의 ‘작은 세계’로서 기능한다. 그는 길거리의 매춘부로부터 돈을 받거나, 마약을 하는 친구를 두는 등 세상의 이면을 목격하는 동시에, ‘하밀 할아버지’로부터 종교의 계율을 비롯한 가르침을 받으며 ‘벨빌’을 온 세상으로 삼아 살아간다. 이렇듯 복합적인 공간인 ‘벨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기에 구성원들이 피부색이나 종교로 구분되지 않으며,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만 규정된다.


‘모모’의 삶을 헤집는 것은 바로 ‘로자 아줌마’의 노화이다. 소설은 그녀의 고통을 “자연의 법칙”에 빗대어 묘사한다. ‘모모’에게 있어 노인들을 공격하는 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며, ‘로자 아줌마’가 늙어서 죽어가는 “자연스러운 일”은 “동정심이란 게 없는”악행에 불과하다. 무력하게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는 가운데 ‘모모’는 “자연 속의 예비 부속품들인 인간”이 외면되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모’는 자연 앞에 놓인 인간으로서의 생을 “빌어먹을 생”이라 일갈하며 절망한다.


그래서 ‘모모’는 “자연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는 서커스의 광대를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결코 죽지도 않는다”며 칭송한다. 또한 ‘롤라’가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동시에 가졌기에 “자연의 법칙과 해결을 보지 못해”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렇듯 ‘모모’가 끈질기게 탈피하고자 하는 “자연의 법칙”은 그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나딘 아줌마’의 녹음실에서 극복된다. ‘모모’는 녹음실에서 영화를 더빙하기 위해 계속해서 장면을 되감는 그녀의 모습에서 “세상을 뒤로 더 뒤로 거꾸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그래서 ‘로자 아줌마’의 노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나아가 그녀의 열다섯 살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한다. 이로 인해 ‘모모’에게 “녹음실”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세계가 된다. 이 “녹음실”에서 ‘모모’는 ‘나딘 아줌마’가 주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신과는 속한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희망한다.


또한 ‘모모’의 생부 ‘유세프 카디르’가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집을 방문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매춘부인 아내 ‘아이샤’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그는 심장병으로 죽기 전에 아들을 보기 위해 ‘로자 아줌마’를 찾아간다. 그녀는 유대인 아이 ‘모세’가 ‘유세프’의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는데, 이에 ‘유세프’는 자신은 아랍인 아들을 원하며 유태인 아들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는 자신의 아이를 돌려 달라고 한다. ‘로자 아줌마’는 인종과 종교의 집착하는 그의 모습을 비웃고, ‘유세프’는 심장병이 재발하여 결국 사망하게 된다.


‘모모’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나이가 열 살이 아니라 열네 살임을 알게 된다. 이는 ‘로자 아줌마’의 계획에서 기인하는데, 그녀는 ‘모모’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그의 나이를 속이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네 살을 더 먹게 된 일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혁명”이라고 표현하며, 이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방문으로 순식간에 네 살이라는 나이를 먹게 된 ‘모모’는 서커스의 광대처럼, 혹은 “녹음실”에서 되돌려지는 시간처럼 “자연의 법칙”에 반항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대응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모할까. 그는 “자연의 법칙”에서 탈피하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한계로 인해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막을 방편은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생에서 구해내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는 “미친” 행동을 택한다. ‘모모’는 인간의 마지막에 있어서의 “최후의 결정”을 “의학이 한다는 것”, ‘로자 아줌마’가 이미 “충분히 괴로운 생”을 살았음에도 지속적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다. 그렇게 “세상에 단둘뿐”인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빌딩의 지하실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손을 맞잡으며 “자연의 법칙”에 대한 저항을 체념한 채로 도래할 이별을 기다린다.


"그래서 여러분이 모두 왔고, 내게 어떤 의무도 없는 여러분이 나를 이곳 여러분의 시골 별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랑해야 한다."


소설은 위와 같은 서술로 끝을 맺는다. 사망한 ‘로자 아줌마’와 그녀의 곁을 지킨 ‘모모’는 결국 사람들에게 발각된다. ‘모모’는 구급차에. 실려 구출되고, 그의 호주머니 속에 있던 ‘나딘 아줌마’의 번호가 적힌 쪽지가 발견되고, ‘모모’는 ‘나딘 아줌마’의 가족과 살게 되며 그가 그토록 바라던 “자신과는 속한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편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형식이 비선형적이라는 점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 앞의 생>은 소설 내내 과거형의 시제를 취한다. 이는 성인이 된 ‘모모’가 자신의 생을 회상하는 소설의 형식에서 기인한다. 그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불쌍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다짐하듯, <자기 앞의 생>은 가상의 인물인 ‘모모’가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던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되짚어보는 서술 그 자체이다. 소설 내부에는 이를 방증하듯 다음 장에 있을 일을 미리 예견하거나, 인물들의 실제적인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곳곳에 활용한다. 이로써 소설 속 이야기의 작가, 즉 이야기의 외적 존재로서의 ‘모모’는 ‘나딘 아줌마’가 알려준 방법,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열네 살 소년 시절의 ‘모모’를 소환하고 이를 문학이라는 방법으로 승화시켜, “자연의 법칙”과의 싸움을 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자기 앞의 생>은 인물과 형식을 통해 “자연의 법칙” 속에 놓인 인간의 “생”, 이러한 “빌어먹을 생”과 이를 거부하는 인간의 갈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모모’는 “생”을 언급하며,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생”은 “자연의 법칙”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며, 인간은 자신을 외면하는 “생” 속에서 고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제 다시 소설의 서두로 되돌아가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첫머리에서 언급된 발췌문의 “생의 맛”은 고통으로 만연한 인간의 삶 속에서 도출해 낸 의미이다. 이러한 “생”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미친 사람들”의 몫이다. 즉 인간을 괴롭히는 “자연의 법칙”으로 가득한 “생”에서 쥐어짜낸 정수는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하실 속 악취를 풍기는 시체가 되어버린 ‘로자 아줌마’의 옆을 ‘모모’가 지키는 끔찍한 소설 속 일화는 ‘모모’가 사랑으로 충만한 “생의 맛”을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모모’는 이 과정들을 견디고 나서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며 이야기의 방법으로 “세상을 거꾸로 돌려” ‘로자 아줌마’를 추억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생이 가하는 고통에 눈이 멀어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자기 앞의 생> 속 ‘모모’라는 가상의 인물의 삶에서 도려낸 “생”의 단편, 그리고 이로부터 얻어낸 의미는 모두 사랑으로 가득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설에서 드러나듯 “빌어먹을 생”에도 “생의 맛”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지 않을까. “생의 맛”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미친 자들의 전유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해야 한다. 빌어먹을 생보다 앞에 놓인 사랑을.




by.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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