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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살아가야 한다

사랑에 대하여 4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사람과 사랑과 삶은 닮았다. 사람의 끝을 흘려 발음하면 사랑이 되고, 사랑과 사람 사이 어딘가에 힘을 주어 말하면 삶이 된다. 또 사람이라는 명사는 ‘살다’라는 동사에서 출발했다. 곧은 직선으로 탑의 형태를 이룬 生은 날 생과 살 생의 의미를 둘 다 가지고 있어, 난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 사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국어학 지식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자음 모음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묶어 연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본능이다.

그 본능은 경험에 기반한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끝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으로 또 살아가는 경험말이다. 결코 우연일 리 없는 모든 연관성의 뿌리를 찾다 보면, 많은 것을 껴안고 있는 ‘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과분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겨우 사람만으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생의 특권이다. <자기 앞의 생>은 최소한의 권리도 없는 사회 속에서, 생의 유일한 특권인 사랑이 이루어지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랍인과 유대인과 노인과 환자, 매춘부와 버려진 아이들… 두려웠던 과거와 더 두려운 현재까지. 모든 게 죽어있는 그곳에서 타인을 애틋이 여기는 마음만이 살아남아 서로의 생을 지켜준다.


사랑은 사람을 궁금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흔히 ‘공감’이나 ‘감수성’ 때로는 ‘연민’이나 ‘의존’으로 불리는 것들이 특정 개인을 향해 특별해지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모습을 띠게 된다. 우리 사회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만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보여주는 연대는 결코 사랑 바깥에 있지 않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곧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다는 뜻이고, ‘사랑해야 한다’ 며 슬플 만큼 단정적이었던 마지막 구절은 곧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향한 외침이었다.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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