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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오직 주체로서의 사랑

사랑에 대하여 4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사랑’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참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의하면, 난 내 팔찌도 귀중히 여기고, 기타도 몹시 아끼고, 책도, 인형도, 음악도 그리고 또…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허무하다. 이렇게 쉬운 것인데 무엇하러 사랑을 세상의 온갖 멋진 말들로 포장해서 뜯기도 어렵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그 대상이 사람이 되었을 때의 주저함은 떨쳐내기 어려운 것 같다. 대상이 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주체이자 객체가 된다.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만드는 기대는, 그러지 않으려 해도 일말의 실망을 만들어 낸다. 아프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가 주저함을 만들지 않나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객체가 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책 <자기 앞의 생>에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모하메드가 등장한다. 모하메드는, 젊은 시절에 매춘 일을 하다 이제는 다른 매춘부들의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는 로자 아줌마의 손에 자란다. 책은 그런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상황을 모하메드의 눈을 통해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그 과정 속에서 모하메드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다양한 상황들을 겪으며 ‘생(生)’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로자 아줌마가 죽게 되고, 그 자리를 지키던 모하메드는 구조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모하메드는 사랑에 서툰 아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로자 아줌마는 그리 좋은 양육자가 아니었다. 태어난 후로 제대로 된 사랑의 주고받음을 겪지 못했기에 서투를 만도 하다는 것이다. 책 속에서는 다음 두 상황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진열대 위의 토마토나 멜론 따위를 슬쩍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기다렸다. 주인이 나와서 따귀를 한 대 갈기면 나는 아우성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p. 17)


“그 개 때문에 한 가지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그 개를 끔찍이도 사랑하게 되었다 (…) 나는 녀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 나는 오백 프랑을 받고 쉬페르를 그녀에게 넘겼는데 (….)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p.28~30)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한 뒤 모하메드는 책의 후반부에 로자 아줌마가 치매를 얻고 이제는 몸에 성한 곳이 없어졌을 때, 병원 입원을 권하는 카츠 선생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 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p.268)


정신이 멀쩡했을 때 로자 아줌마는 입원을 두려워하고 안락사를 원했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모하메드는 결국 안락사를 시켜주지 않는 카츠 선생을 피해 아픈 로자 아줌마를 그녀의 비밀 지하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후 죽은 로자 아줌마의 화장을 고쳐주고, 향수를 뿌려주며 그 자리를 지켰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항상 동경해 왔다. 대상이 사람일 때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동경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읽으면서도 궁금했다, 무엇이 모하메드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사랑해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물론 그것이 모하메드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로자 아줌마에 대한 연민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결국 나의 눈에는 그것이 사랑으로 보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하는 방법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하기 싫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닐 수도 있겠다는 뭐 그런 거.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 311)


사랑해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이렇게 어렵게 들린 건 또 처음인 것 같다. 무엇을 사랑하라고 한 것일까. 이름 붙인 우산일 뿐인 아르튀르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을까. 진정으로 아르튀르를 사랑할 사람은 본인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을까. 결국 다시 사람이 사물에게 갖는 오직 주체로서의 사랑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일 테니.




by.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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