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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나의 지평선 너머

사랑에 대하여 4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벌써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게 마지막이라니. 아직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제가 보편적 사랑 혹은 인류애라는 주제로 좁혀진 것(혹은 확장된 것)이 마음에 든다. 나의 경우 처음부터 사랑 중 성애적 측면에 대한 거부로 길을 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 이 물음에 대한 것을 시작으로 ‘자기 앞의 생’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왜 성애적 사랑에 대해 회의하는가? 물론 ‘사랑’의 의미가 성애적 측면으로 갇히는 것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고, 내가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일정 부분 회의를 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독 이 ‘성애’에 대해서 심하게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느낌으로만 갖고 있던 답은 뜻밖에도 ‘자기 앞의 생’에서 좀 더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 사는 아랍계 14세 소년 ‘모하메드’(일명 ‘모모’)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는 세 살 때부터 유대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서 자란다. 로자는 아우슈비츠에 가는 등 유대인으로서 고초를 겪은 경험 때문에 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그는 쉰 살까지는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후에는 모모처럼 오갈 곳 없는 창녀의 자식들을 돌봐주며 살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그의 손을 거쳤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로자는 언제나 이 생활이 지겨운 듯 굴지만 모모가 떠날까 봐 그에게 나이를 4살이나 낮추어 알려주기도 하고, 모모는 도망치고 엇나갈 것처럼 굴면서도 언제나 로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쇠약한 로자의 몸은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로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이다. 결국 두 사람은 아파트 지하로 도망치고, 모모는 로자의 시신 곁에서 살다 발각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모모에게 하밀 할아버지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어떤 효과가 있길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까?


사실 소설 초반부에는 ‘과연 모모는 로자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다. 모모의 시선 속에서 로자는 늘 혐오의 대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모모는 그 모습 속에 파묻힌 로자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준다. 그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와 같은 것 말이다. 언제든지 떠나고 싶은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언제까지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마음도 사랑의 표현이다. 때로 끔찍해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이 품은 속성이 아닐까. 로자에게 향수를 부어가며 시신의 곁을 지키려는 모모의 모습을 보며 소설 안에서 등장한 구절이 떠올랐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세상 모든 것은 온전하지 못하다. 인간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견딜 수 없는 지점, 끝없이 추락하는 심연이 있다. 사랑은 어쩌면 그 흰색 속 검은색을 견디고 검은색 속에서 흰색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가족이 아니었다면,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견디지 못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랑이 삶에 필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독립적이지 못한 우리가 세상을 견디기 위해, 서로를 견디기 위해.


다시 돌아와 성애적 사랑에 대한 회의감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인내가 아니라 소비이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서로의 추악함을 견뎌내고 응시하며 끝끝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 단단해진 사랑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대체로 성애적 사랑은 욕망과 페티시즘적 소비를 통해 추악함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욕구가 충족되거나 식어가는 순간부터 끝없이 실패를 거친다. 그다지도 아름다웠던 사람이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실망감이 그것을 가속한다. 물론 이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유통기한은 내가 생각하는, 혹은 이번 주제를 포함하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보편적 사랑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보편적 사랑. 그것은 필시 성애적 사랑보다 어렵고 무겁다. 하지만 분명한 건, 세상을 위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많은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를 견뎌내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점은 특히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수많은 약자들을 보며 더 느낄 수 있다. 소설 속에는 흑인, 아랍인, 유대인, 여성, 트랜스젠더 등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프랑스인’이 아니라서, 혹은 ‘프랑스인’이라서 괜찮고 괜찮지 않은 문제들은 너무나도 많다. 이는 소설 속 배경에서 프랑스의 사랑이 ‘명백한 프랑스인’에게로 좁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응시하고 견디며 발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안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견디길 포기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면면을 외면하며 산다. 너무나도 좁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거꾸로, 나와 너무나도 다른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사랑을 통해 견디는 세계의 지평은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아랍인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던 나딘의 아이들이 모모를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의 사랑은 보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뒤돌아보면 세상은 얼마간 더 살만한 곳이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 사랑의 보편을 넓힐 이유가 아닐까.



by. P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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