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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9. 2022

미래를 꿈꾼다는 것 : 꿈꿔왔던 미래의 기록

4월 : 꿈꾸는 미래


내가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나는 사랑받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었고,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었다. 과분할 정도로 풍요로운 가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다. 아마 그 뒤엔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철없음을 방패 삼아 그런 노력을 ‘모른다’로 당연하게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학창 시절 사람을 좋아하는 밝은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괴로웠던 시간도 있었다. 싫은 일도 좋다고 둘러서 말하고 모든 사람을 아끼던 나였기에 그 괴로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며 고등학교 2, 3학년에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방황을 하며 갑자기 길을 틀어 평범한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려 준비했다. (여기서의 ‘평범한 길’ 이란 수능을 보고 서울 안의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 서울에 사는 수험생의 일종의 필수 코스를 말한다.) 영상과 영화가 좋아 갑자기 그 길로 틀어 공부를 시작했다. 짧으면 짧았던 영상예술에 대한 공부였지만 그때 나는 가치를 메길 수 없는 배움들을 얻었다. 그 후 목표가 바뀌어 대학에 가고자 결심했고 재수를 했다. 다시 공부했다. 열심히 했다. 대학에 왔다. 내 존재에 대한 해결책을 잡아가니 다른 일들이 나를 붙잡았다. 다시 방황과 아픔의 시간을 거쳤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매 순간마다 우리는 꿈을 꾼다. 어릴 때도, 성인이 되어도. 그 순간순간마다 나를 일으켜 꿈꾸게 했던 것들을 찾다 보면 지금의 내가 꿈꾸는 미래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꿈꿀 수 있게 했던 것들

고등학교 때 에세이에 빠져서 에세이란 에세이는 다 읽어봤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지금 읽으라면 그렇게 빠져서 못 읽겠는데 그땐 왜 그렇게 에세이가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마 내가 아픈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가장 쉽게 경험할 수 있어서 그랬던 같다. 뒤따르는 구절은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라는 책 속 내가 가장 많이 읽고 또 읽었던 부분이다.



“자존감이 흔들리는 날이면 삶이 늘 내게 묻는다. 너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싶냐고. 그때마다 나는 한결같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면 좋겠다고.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든다고. 마찬가지로 나의 이런 무료함이 썩 밉지만은 않다고. 언제나 내가 가장 빛나는 때는 나의 선택으로, 나의 결과에, 나의 미소로 답해줄 때였다. 하여 지나치게 삶이 버거운 날이면 조용한 곳에서 울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누구처럼 남들처럼 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되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 한마디가 늘,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부둥켜안고 운다. 어쩌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목적이고 과정이자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닐까. 처음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부터 마지막 눈물을 흘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일 때 가장 알맞다.”



이 구절을 쓰고 읽기를 반복했었다. 학창 시절 나는 나에 대한 주관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나를 깎아내린다면 그것이 오롯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마음이 다 망가져 상처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스스로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발악했었다. 이 구절을 곱씹었던 것도 아마 그 발악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시간이 한참 흘러 오랜만에 이 페이지를 읽자 비로소 다음 단락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가치 있는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나 본연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일 터. 행복도, 슬픔도, 상처도, 외로움도 모두 나의 것, 내가 겪고 있는 것, 내가 느끼고 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품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는 동안은 무엇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인정해가는 것이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슬픈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아닐까.”



예전에는 이 단락보다 앞의 글이 더 잘 들어왔었는데 이젠 뒤의 글도 보인다. 그 이유는 지금의 내가 나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나의 가치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의 나는 모든 꿈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지금의 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편지로 주고받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편지 속에는 그 시절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참 많다. 그중 나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편지 몇 개를 골라왔다. 그 편지와 함께 노래도 몇 곡 설명하고자 한다.


“노래도 노래지만 앨범 소개에 실린 글을 읽고 정말 오랫동안 네 생각을 했어.
인간의 이타성이란 그것마저도
이기적인 토대 위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홀로 고립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괴로워 재촉하듯 건넸던 응원과 위로의 말들, 온전히 상대를 위해 한 일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내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참견을 잘 참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그런 행동들이 온전히 상대 만을 위한 배려나 위로가 아닌 그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보고 싶은 나의 간절한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염치없이 부탁하는 입장이니 아주 최소한의 것들만 바라기로 한다. 이 시를 들어 달라는 것, 그리고 숨을 쉬어 달라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평생 업고 갈 수 있는 타인은 없다. 하지만 방향이 맞으면 얼마든 함께 걸을 수는 있다. 또 배운 게 도둑질이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 노래를 불러줄 수 있다. 내가 음악을 하면서 세상에게 받았던 많은 시들처럼 나도 진심 어린 시들을 부지런히 쓸 것이다.
그렇게 차례대로 서로의 시를 들어주면서, 크고 작은 숨을 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어떤 거 같아?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했던 건 아닐까 너를 위해서 한 일이랍시고 합리화하면서 널 더 힘들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작년 이맘때쯤에 그렇게 너한테 화를 낼게 아니라 그냥 한 번 더 안아줘야 했던 게 아닐까.  나도 내가 염치없이 부탁하는 입장이었다는 걸 더 빨리 느꼈어야 하는데, 내가 뭐라고 너한테 무리한 요구를 했던 거 같다. 미안하고 고마워 그리고 내가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최소한의 것은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것이야. 항상 있었던 사람처럼 그냥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내 옆에 있어줘 난 이제 그것 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편지 속 노래

" 아이유 Love poem 들어보기 "


고등학교 때 친해져서 지금까지 여전히 내가 가장 예뻐하고 있는 친구의 편지 중 일부를 오랜만에 꺼내어 읽고 가져와봤다.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떨궜는지 모른다. 내가 힘들었음을 인정하는 과정도 버거웠는데 그 과정을 이해하고, 알아주고, 더 감싸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어떤 이의 말은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의미가 없다며 나를 부정하는 순간들마다 그렇지 않다고 손을 꼭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전에도 이런 사랑을 당연하다며 고마움을 잊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이후로 나는 이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어떤 일이라도 묵묵하게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더 힘차게 일어났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만 않았다. 파도는 늘 물밀 듯 들어와 나를 무너뜨렸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이 노래와 함께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겨 나갔다. 나는 여전히, 전보다 더 간절히 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이들에게 원 없이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삶을 꿈꾸기에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낸다.


“사실 버티는 힘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거 같은데, 그 엄청난 에너지를 다른 데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은 것 같아. 그러면 훨씬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있잖아. 가진 감정을 소모시키는 것보다 새로운 감정이 생기는 것도 큰 기쁨이기도 하고, 00아, 나는 네가 얼마나 보배로운지, 얼마나 드문 존재인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스스로 꼭 알았으면 좋겠어.”


중학교 때, 가장 많이 따르고 좋아하던 선생님이 써 주신 편지 속 일부이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정이 많고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싫었다. 그게 마치 불행인 것처럼 여겼고 나를 혐오했다. 그러니 당연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를 거치고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고 그리고 이 편지를 다시 읽었다. 전에는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을 때마다 받았던 많은 편지를 다시 읽고 곱씹었다. 그러니 기록을 다시 읽는 행위도 어쩌면 살기 위한, 나도 몰랐던 나만의 방책이었던 것 같다. 전에는 그냥 눈물만 났다면 이 편지를 읽는 지금은 내가 사랑받기 합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불행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던 내 성격이 예전부터, 아니 그 어릴 적에도 누군가에게는 보배이며 기쁨으로 보였다는 게 내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웃게 하는 것이 내 취미가 되었다. 가진 감정을 스스로 소모시키는 나만의 방식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가진 다정함으로 타인을 대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내 꿈이 되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내 마지막 꿈의 목표인 예술 하는 사람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마음도 이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꿈을 꾸며 새 출발을 다짐할 때 들었던 노래들이 있다. 두 곡을 소개하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제이미의 Apollo 11과 미란이의 Daisy라는 곡이다.

 

지금 느낌은 I'm on Apollo 11
지켜봐줘 위대한 내 첫 스텝을
You know I'm strong
깃발이 꽂혔을 때는
미래의 책들에 써질 history
작은 한 걸음이더라도
내 내일에 기댈 가져 달라고
지금 이 노래를 부르고 있어
너도 불러 주기 만을 바라고 있어

[ Apollo 11 by 제이미 ]
들어보기


너무 많은 위기를 넘으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날 잃기도 해
허나 계속 시비를 걸어도
나만은 이제 나를 꼭 믿으려 해
넘어져 찢기고 버려져도
다시 털고 일어나면 그만인데
난 숨을 이유가 없어
다 싸워본 후에야 back to my street
그전엔 난 돌아갈 수 없게 태웠지
작은 미련들까지도 흔들 수 없이
무정한 이 도시 위에 끝까지
난 가지고 싶어 나의 온기를

[ Daisy _ 미란이 ]
들어보기



마지막으로 내가 꿈꿀 수 있게 영향을 준 콘텐츠를 가져왔다. 여태 내가 봤던 콘텐츠가 족히 몇 백 개는 넘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2020년 방영되었던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 속 장면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소개되어있다.  



“버거운 삶의 무게로 사랑을 거부하는 정신 병동 보호사 강태와 태생적 결함으로 사랑을 모르는 동화 작가 문영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가는 한 편의 판타지 동화 같은 사랑에 관한 조금 이상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다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각자의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치유하는 드라마라고 “매우 축약”해서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드라마는 추가로 이런 말을 전하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국민 80% 정신증을 앓고 있고, 그중 20% 약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이런 시대에 과연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있을까? 단순히 ‘다수 ‘정상 되는  폭력이 아닐까?   통하고, 이해될  없는 존재는 격리와 감금만이 답인가?

신은 인간을 본디 외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더듬는  인간의 본능이다. 결국 모든 의문의 답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의 외면 때문에 상처 입고  사람의 온기로 치유받는다.  드라마도 그것을 원한다. 결핍과 상처투성이인 주인공들이 서로의 온기로 치유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부디 당신이 위안받을  있기를...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엄청난 흥행을 일궈냈다. 드라마 소개에서 말하듯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 사람은 본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사람들 덕분에 이겨낸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마음 앓이를 해온 시간이 많았다. 나아지려고 발버둥 쳐도 늘 그 자리인 나를 바라보며 무너지기를 수십 번, 악착같이 노력해 겨우 일어나 다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쯤, 그때쯤 이 드라마를 봤었다. 16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러네.. 안 지워지면 더 좋은 걸로 덧칠하면 되는 거네.”
“나비는 프시케, 프시케는 치유, 치유의 나비. 착한 나비. 오빠가 그려줄까? 한번 볼래? 구경할래?"
“응 예쁘게 그려줘.”

드라마 속 이 장면 보러가기

1:20부터


처음 이 장면을 보고 몇 번이나 돌려봤었다. 나도 극 중 고문영이라는 캐릭터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게 맞네,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 지우려고 애쓰지 말고 더 좋은 기억으로 그 위를 덧칠하면 되네.’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일 수 있기에, 나에게 이 드라마의 이 한 줄 대사는 마음속 깊이 박혀 이겨낼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이 되었다. 그 뒤 나는 나에게 비슷하거나 약간 힘든 일이 다가오면 속으로 떠올린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불행을 야기하더라도 또 다른 일로 극복하고 또 다른 기억으로 채워 나가면 된다고. 그래서 내가 꿈꾸는 일이 생기면 고민 없이 뛰어들게 되었다. 덧칠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 칠했을 때 덧칠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혹여 그림이 망가지더라도 이젠 정말 괜찮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마치며

꿈을 꾼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어쩌면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이기에 특별하기도 하다. 그 꿈꿀 수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곤 하는 것 같다. 현실을 바쁘게 살아가면서 꿈의 중요성을 인지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글 쓰는 시간을 통해 내가 온전히 꿈을 꿀 수 있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애써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켜왔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본인의 꿈이 무엇인가요?”라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글쎄 뭐라 단정 지어 대답할 수는 없겠다. 다만 나에 대한 기대,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 나의 가치는 나를 꿈꾸게 만든다. 가장 힘들고 아팠던 순간에도 꿈을 꾸기에 일어날 수 있다. 꿈이 모이고 모여서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기쁨 때론 슬픔 등의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그들과 함께 매일 또 다른 꿈을 꾸며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모른다. 계속 꿈을 꿀 수 있는 삶. 그 자체가 나의 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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