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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둘이어도 모자랄 봄!

산골 이세이

by 버폐

몸이 둘이어도 모자랄 봄!

한 해 가운데 ‘이맘때’가 제일 바쁜 듯하다.

겨울잠 자고 나오는 곰(본 적은 없지만)처럼 기인~ 겨울 동안 (추워지면 찾아오는 이들도 뜸하고 문밖 나들이할 일도 적어지니) 잠자듯 웅크리고 있다가 땅심 풀리고 뾰족뾰족 연둣빛 풀빛들이 기지개를 켜면 덩달아 기지개 켜면서 오랍드리를 어슬렁거리곤 한다.

봄기운은 왠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은 어슬렁거리고 싶어도 어슬렁거리지 못하게 만드는 힘도 있다. 거름 냄새의 힘이다. 앞뒤 옆이 너른 밭이고 농사짓는 주인은 다르지만 ‘이맘때’ 면 1톤급 물탱크 정도의 큰 거름 가마니를 밭 길가에 잔뜩 부려 놓았다가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남짓 지난 뒤 한 번 갈아엎은 밭에 흩뿌린다. 잘 썩은(발효) 거름이면 그나마 나은데 설 썩은 거름은 코를 싸쥐게 만든다. 뿐만이 아니라 거름 냄새는 밤이 되면 착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냄새는, 지은 지 오래되어 바늘구멍 같은 틈이 많은 집 안으로 꾸역꾸역 밤새 들어와 차지하고 앉아 집안을 온통 재래식 뒷간에 앉아있는 것만 같게 만든다. (시골에서 집을 지을 때는 단열은 물론 틈도 꼼꼼하게 막아야 한다.)


농사에서는 튼실하고 보기 좋은 채소를 키워낼 밑거름이고, 꼭 필요한 (걸로 여기는) 거름, 그 냄새를 참고 지내야 할 며칠이 봄마다 있는 연례행사거니 여기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은 안 된다.

다행히 밭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배려해 빨리 밭을 갈아엎으면 그나마 거름 냄새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흙의 힘이다. 흙이 거름 냄새를 싸안는 덕분으로 코를 싸쥘 정도의 냄새가 사그라들면 다시 어슬렁거린다.




싱그런 바람 내음 흙 내음이 감도는 봄기운을 흐읍-! 들이마시다 보면 나의 손과 발을 붙잡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환삼덩굴싹, 두 개의 떡잎에 연자줏빛 줄기가 긴~ 이맘때의 어린 환삼은 그저 여리디 여린 새싹일 뿐이지만 보일 때 바로 뽑지 않으면 하루가 다르게 잎이 퍼드러지고 줄기가 거칠어지면서 사방의 풀과 나무를 뒤덮어 가며 억세게 뿌리를 내린다. 그악스럽게 땅을 움켜잡고 있는 뿌리를 뽑을 때는 뽑는 사람의 팔 힘줄까지 움켜잡는 듯 힘이 들기에 어릴 때 쏙쏙 뽑아야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야멸차고 모지락스레 보이는 대로 쏙쏙 뽑아 땅 냄새 흙냄새 못 맡게 시멘트 길이나 돌 위에 던져두어 햇볕에 말라죽도록 만드는 일도 이맘때다.



이맘때 반드시 하는 일은 또 있다.

여름철 큰비가 오시면 흙이 흘러내려 집 둘레의 작은 물길은 없어진다. 흘러갈 길 찾던 빗물이 행여 집 안으로 들어올까 염려하는 마음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이 흘러갈 길을 미리 만드는 일이다. 한편, (나처럼) 겨울 동안 엄두가 안 나 꼼짝(?) 하지 않다가 날 풀리고 꽃바람 소식 있을 때면 이차저차 겸사겸사 들르는 손님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도 이맘때의 일이고, 틈틈이 꽃밭 구석구석도 뒤집어 교통정리를 해주는 일도 이맘때다. 제때 해주지 않으면 톱풀꽃이랑 끈끈이대나물꽃과 비올라 금낭화 패랭이 상사화 벌개미취 작약 아이리스 원추리가 뒤죽박죽 뒤섞이다가 뿌리를 뻗지 못한 약한 꽃들은 그다음 해 못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가나 밭 가에는 시멘트로 된 도랑이 있기 마련이다. 농사지을 때 필요한 물길이다.

졸졸 흐르던 물이 얼어 있는 동안 산자락과 비탈밭에서 바람이 날라다 놓은 흙과 나뭇잎 나뭇가지들이 차여 얼음이 녹아도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있다. 물비린내와 함께 나뭇잎 썩는 냄새가 가득한, 차인 나뭇잎이나 잔가지와 흙을 걷어 올리는 놀이 시간도 이맘때다. 괭이를 들고 놀다 보면 가끔은 배를 뒤집고 죽어 있는 개구리들을 볼 때가 있다. 아마도 포근해진 봄기운에 서둘러 겨울잠을 깨고 나왔다가 느닷없이 내리는 눈과 영하로 뚝 떨어지는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죽은 개구리들을 묻어주는 일도 이맘때의 일이고, ‘편리함을 선택한 결과로 쓰레기양이 더 늘어날수록, 내성이 생긴 잡초와 해충을 없애겠다고 여러 가지 농독(제초제·살충제·살균제)들이 더 늘어날수록, 더 좋다는 설거지 빨래 세제들을 더 많이 쓸수록, 인간들의 삶이 더 편리해질수록 환경과 자연 기후는 더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 죽은 개구리들을 보면서 한 생각이 일어나 모골(毛骨)이 오싹 쭈뼛해지는 것도 이맘때의 일이다.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기후가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몇 해 전 이곳 봉평에는 5월이 다 되어가는 때 엄청난 눈이 내렸다. 고추 모를 심고 한창 농사를 짓는데 냉해(冷害) 입은 고추가 다 얼어 죽자 그만 아득해진 젊은 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다. 어디 봉평 뿐이겠는가.

어느 해 여름, 아랫녘에 사는 지인들이 ‘물 아껴 쓰기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보니 지난해 8월엔 퍼붓듯 쏟아진 집중 호우로 열아홉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고 한다. 겨울부터 여름이 되도록 눈은커녕 비도 한 방울 오지를 않아 역대 최장 기록이 될 만큼 가문 날이 이어졌단다. 이렇게 가다 보면 추위로 사람이 얼어 죽었다는 뉴스가 유럽과 아메리카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건 아닌지…,


겨울이 길게 느껴지는 올봄, 어느 지역은 눈이 너무 많이 오셔서 어느 곳은 가물어서 속을 태우던 날들에 여의도 면적 166배 크기의 산을 화마(火魔)가 앗아갔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자연환경 파괴는 물론 고통의 악순환이 해마다 거듭되고 있음에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안타까움이 마음을 짓눌러 온다.

그렇다고 한탄만 할 수 없는 일!

올봄 이맘때 나의 일은 지난해 헐어낸 외양간과 헛간채가 남긴 쓰레기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웃들은 “그냥, 땅 파고 팍 묻어버려요.” 하는데, 하나하나 분리해가며 자루에 주워 담는다. 덤으로 녹슨 못, 비닐, 깨진 그릇, 유리, 플라스틱 조각들도 따로 담는다.

70년대 지었던 헛간은 노끈과 왕골과 싸릿대와 소나무 가지로 엮어 벽을 세운 뒤 진흙을 이겨 발랐고, 그 뒤 시멘트를 덧바른 듯하다. 싸릿대와 왕골을 엮느라 굵은 나뭇가지에 촘촘히 감은 노끈을 빙글빙글 풀어내 굵은 나뭇가지는 옆집 화목 보일러실로 옮겨다 놓고, 왕골과 싸릿가지는 ‘썩겠지’라는 생각으로 엄나무 뿌리 쪽에 쌓아두고, 시멘트에 붙은 흙은 털어내고 자루에는 시멘트만 담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훅 지나간다.


자연으로 돌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돌리고 버릴 것은 돈 주고 버리려는 이런 행동을 처음엔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간섭하던 옆집 이웃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봄, 남들은 제초제와 비닐 멀칭으로 농사 준비에 여념 없을 때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비닐을 캐며 지렁이가 살 수 있는 땅을 만들려는 몸짓, 나만의 의식(儀式)이 펼쳐지는 이맘때, 봄이다.


오늘은 쉬란다. 먼 산을 하얗게 뒤덮으며 펄펄 내리는 눈에, 오디처럼 조롱조롱 맺힌 라일락 꽃봉오리 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얹고서 모처럼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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