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문학 소년이다. 노안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 때 문예창작과 진학을 고민했다.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이라도 받은 적이 있냐'는 누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 후로도 책을 읽어오다 용인이 한글을 깨치자 독서 목록을 작성했다. <소공녀>, 자본주의판 신데렐라 이야기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자극적이지 않아 어린 소녀가 읽기에 좋다. 용인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추리소설의 시작이라 불리는 이 책은 대중 소설의 흡인력을 경험할 수 있다. 용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후에 인생의 지혜를 우화로 옮긴 글이다. 용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좁은 문>, <대위의 딸>, <데미안>을 모두 포기하고 간결한 문체로 독일 교과서에도 실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추천했다. 이마저 흥미를 보이지 않자 서울은 좌절했다. 더 이상 책을 권하지 않았다.
독서를 하지 않은 용인은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회 시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답을 쓰지 못했다. 비문학 공부라도 시킬 생각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들추다 그 이름을 발견했다. 성석제.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시기에 실금 같은 문을 열어준 작가다. 그의 글은 언제나 유쾌했고 사진도 웃고 있다. 서울 나름의 계보에 따르면 그는 김영하, 박민규와 함께 비주류에 속한다. 김영하가 그중 기성 문단에 가깝다면 그 반대편에 박민규가 있고 그는 중간쯤에 속했다.
김영하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추는데 비해, 성석제는 언제부턴가 신작이 끊겼고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혼자 좋아했던 작가로 사라지나 했는데 웬걸,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글이 실려 있다. 한두 문단에 불과하지만 그 작품을 알고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 글을 발표하기 전에 어떤 소설이 있었고 그 후의 작품도 안다. 야당의 단일화가 실패하고 군사 정권이 이어지던 1990년대, 문학계는 소위 운동권 후일담 일색이었다. 좀 더 치열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떠난 이들을 야속해하며, 남은 이들의 생활고 얘기로 채워졌다. 그 와중에 그의 글은 날렵하고 명랑했다. 진실되려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서울은 오랜만에 동네 형을 만난 듯 반가웠다. 국어 공부는 잠시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