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웅녀

by 애프릭

단군 신화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 흔히 하늘나라 임금의 아들인 환웅이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던 중에,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찾아왔고, 그중 곰만이 21일 동안 쑥과 마늘로 견뎌 여인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환웅이 그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한 가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단군에게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누락된 것은 농경 사회에 뿌리 깊던 남아 선호 사상 때문이거나, 신비한 능력을 숨기려는 누군가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단군의 누이는 마음만 먹으면 곰으로 변할 수 있었다. 방법은 간단한데 어둡고 밀폐된 장소에서 눈을 감고 주먹을 불끈 쥐면 된다. 더하여 첫 번째 각성을 할 때, 엄마의 기억까지 물려받는다. 다만 이 능력은 장녀에게만 전해지며 18살 생일부터 가능하다. 그녀는 첫 시도를 하면서 옷이 찢어진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다 궁궐에 돌아와서야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헛간에 숨었다가 발각되었다. 다행히 웅녀(당시 왕비)가 달려와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몇몇 사람들은 그네들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곰으로 변신하는 능력은 별 쓸 곳이 없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벌집에서 꿀을 훔칠 때나 유용했다. 그렇게 그 비기는 웅녀 가문에서 엄마에서 딸로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졌다. 역사에 좀체 등장하지 않던 그네들이 처음 기록된 것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될 때다. 중국 역사서 <후한서>에 의하면 성벽 위에 곰 한 마리가 나타나 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2차 공성 때, 처음 모습을 보인 그 곰은 3차 공성까지 잘 막았으나 4차 공성에서 화살을 맞고 사라졌으며 곧이어 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게 된다.


그 후로 삼국이 흥하고 망하고, 고려와 조선이 부침을 겪는 동안 등장하지 않던 그네들의 발자취는 1931년 조선일보에 의해서 알려진다. 이 해는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발표한 해다. 그는 이 책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고 칭하며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역사관을 주창했다. 박은식과 함께 민족사관을 세운 그의 특집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그에게 숨은 조력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빈약한 자료만으로 삼국 시대의 역사를 꿰뚫고 묘청의 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집요한 질문에 신채호는 웅녀라는 여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남기고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로부터 88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웅녀일지도 모를 곰 한 마리가 CCTV에 찍혔다. 섬진강 근처의 861번 국도를 서울 방면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 날은 12.3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날이다. 여의도에 곰이 출몰했다는 기사가 없는 걸로 봐서 도중에 잡혔거나 해제 소식을 듣고 발 길을 돌렸을지 모른다. 그 곰이 그 곰이 맞다면 그녀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한무제와 당당히 맞서 싸웠고, 식민 사관 극복에 힘썼으며, 해방 후에는 양봉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이 글을 읽는다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화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