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옛 친구를 만나는 장소는 장례식장이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서른 쯤에는 타고 다니는 차 얘기를 하며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흘렸다. 마흔이 넘어서는 골프나 주식 얘기를 하며 뒤져지지 않고 있음을 알렸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안부만 물을 뿐, 서로 근황을 묻지 않게 되었다(이혼을 했거나 회사에서 짤렸다고 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얘기가 겉돌지만 옛 친구들과 하는 옛날 얘기는 언제나 즐겁다.
서울이 다닌 장례식 중에서, 책이나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식은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 나온다.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재방을 해서 <타짜>와 함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영화는 이병헌의 찌질한 연기와 박정민의 피아노 실력으로 유명하다. 영화는 노모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생각해 보니 그녀(윤여정)는 한스런 삶을 보상받지 못했다. 형(이병헌)은 백수 생활을 끝내지 못했고, 동생(박정민)은 피아노 무대에 올랐으나 그게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막막한 일상은 여전한데 느린 오후 장례식장 담벼락에 기대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으로 위로를 주다니 예술의 힘이 새삼 놀랍다.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세상과 화해를 보여준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임상수 감독의 2007년작 <오래된 정원>이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이적 표현물 제작 배포 및 소지, 내란 선동죄로 수배되어 도피생활을 하던 현우(지진희)는 윤희(염정아)를 만나 전라도 산골에 숨어 지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을 수감된 동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수를 결심한다. 떠나는 등 뒤로 윤희가 쏘아붙인다. “숨겨 줘, 재워 줘, 먹여 줘, 몸 줘, 왜 가니?”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그 문구다.
십수 년 영어의 생활을 끝내고 세상에 나와보니 모든 것이 변했다. 자기는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외쳤건만 어머니는 복부인이 되어 부자가 되었고 윤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딸아이를 남겼다. 처음 딸을 만나기로 한 날, 현우는 자기가 살아온 삶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한다. 원망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빗속을 뚫고 걸어온 소녀는 밝고 당당하다. 마치 '너만 심각해'라고 조롱하는 듯하다. 뜨거운 화해는 필요 없었다. 신념은 낡고 추억은 바래도 살아갈 날이 있다는 것을 몇 컷으로 보여주다니 명연출이다. 알고 보니 황석영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P.S. 주인공 딸을 연기한 이은성 배우는 훗날 서태지의 아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