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탄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노동 운동을 했다. 좀 한 것이 아니라 노조 위원장을 지냈고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며 법정에 서기도 했으니 많이 한 것 같다. 동탄의 어머니가 사상적 동지였냐 하면 그건 아니고 반대인 듯하다. 사람 모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사람을 이끄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동탄이 초등학교 반장으로 뽑힌 날, 돌아온 것은 칭찬과 격려가 아닌 잔소리였다.
서울은 전교조(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와 전농(전국 농민회 총동맹)이 막 출범하던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다. 얼치기 좌파였던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 앞줄에 서서 보란 듯이 화염병을 들고 싶었으나 형편없는 던지기 실력을 본 지도부의 권유로 뒤에서 돌멩이 나르는 일을 했다. 군대를 갔다 오자 정권이 바뀌었다. 더 이상 민주화를 부르짖지 못하게 된 학생들은 학교 식당에 대해 들고 일어섰다. 맛이 없다거나 가격을 낮추라고 시위했다. 서울 역시 참여했다.
몇 달 전 동탄의 아버지가 그동안 꾸려온 부동산을 폐업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가격이 너무 올라 손님이 없었고,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이자가 비싸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취업 전선에 다시 나서야 했고 지원과 불합격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수위직을 쉽게 보고 대충 면접에 응하다가 이래서는 안 될 듯싶어 복장을 챙겨 입었다. 여기까지가 서울이 알고 있는 바다. 그러다 최근에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00 대학교 경비직이다.
00 대학교라니! 수도권의 많고 많은 대학 중의 하나로 보일지 몰라도 80년대 운동권의 본산이자 사회과학 부문에서 앞서간 학교다. 2005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해서 민주화 공로를 직접 치하했다. 한 때 유행한 네 글자 학과명(낭만 독문, 선봉 수학, 자주 물리 등)을 만든 시초이기도 하다. 서울은 진짜 좌파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으로 동탄에게 아버지에 대해 좀 더 물었다.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구조라고 한다. 그럼 밤에 혼자 있을 수 있다. 낮에 학생들을 지켜본 후, 밤에 느낀 점을 대자보에 적어 학생들과 교감할 수 있다. 신이 난 서울이 떠들었지만 동탄은 시큰둥했다. 그럼 직접 해야겠다! 서울의 장래 희망도 수위가 아니었던가. 경비를 서는 곳 중에 제일 재미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