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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배틀

by 애프릭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공고문이 붙었다. 앞으로 모든 민원, 분쟁은 랩 배틀로 가리겠다는 것이다. 시간은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장소는 1동과 2동 사이 주차장이다. 이런 황당한 아이디어가 어디 있고, 누가 오겠냐 싶었는데 당일이 되자 한두 명씩 주차장으로 모였다. 베란다에서 지켜보던 서울도 용인과 함께 구경꾼들 속에 섞였다. 이 날 당사자는 주차 라인으로 시비가 붙은 1동 402호와 2동 501호였다. 먼저 402호가 랩을 시작했다.


오우~ 선, 선. 선. 너와 나를 나누는 선, 우리 함께 지키는 선, 선이 있기에 내가 있고 선이 있기에 네가 있어, 그러나 너는 지키지 않았지, 그 선을 지키지 않았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서언~,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선!


다음은 501호 랩이다.


너는 아마 범생이, 쫌생이, 학창 시절 내내 떠들지 못하고 칠판에 이름만 적었겠지, 선, 선, 니가 말하는 그 선, 여기 와서 봐, 다시 한번 봐, 내 차는 선 안에 있어, 오른쪽으로 10센티, 왼쪽으로 10센티, 앞바퀴가 어쩌고 저쩌고, 인생 그리 살지 마, 너나 그렇게 살아!



분명 규칙을 지키자는 402호의 주장이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속사폭 같이 쏟아내는 501호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랩 배틀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명물이 되고 다른 아파트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랩 학원을 다니는 사람이 생겼으며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길거리 십 대들에게 배웠다. 이로써 동네 불량 청소년들은 더 이상 눈총의 대상이 아닌 지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광주가 랩 배틀의 당사자로 지목된 것이다. 상대는 경비 아저씨다. 몇몇 주민들이 길고양이에 대해 불평을 했고 캣 맘인 광주가 소환된 것이다.


드글 드글, 드글 드글, 여길 봐도 고양이, 저길 봐도 고양이, 차 밑에도 고양이, 풀숲에도 고양이, 판 판 판, 난장판, 야옹 야옹 양양옹,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고 양양옹, 그래도 너는 좋데, 지만 좋데. 너는 좋은 사람? 그럼 나는 뭐! 드글 드글 드글 드글. 여기 와서 봐. 저기 가서 봐. 그렇게 좋으면 여기 와서 함께 뒹굴어!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라임은 정확했고 비트는 힘이 있었다. 이제 광주 차례다.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냐고~


모인 사람들은 일순 당황했다. 그건 랩이라기보다 단말마에 가까웠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외침이었다. 한 소년이 다가와 자기 핸드폰 번호를 찍어줬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광주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제 그녀는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사료를 가슴에 숨긴고,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몰래 두고 오게 되었다. 고양이들과의 만남은 당분간 미뤄졌다.



*서이제의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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