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하는 삶

초년생을 위하여

by 팔레놉시스

‘진실게임’이 흔하던 시절, 거르지 않고 나왔던 이니셜이 있다. ‘sys’. 소읍의 학교에서, 알파벳 세 글자로 추론할 수 있는 이름 석 자는 하나. 단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진심을 내뱉은 소녀의 얼굴은 이내 자두빛으로 물든다. 고개를 숙이며, 특유의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 그의 성은 ‘손’. 실없는 별명들을 양산하기도 했던 손씨를, 가랑비 뿌리는 이 밤에 나는 호출하는 것이다. 손의 빼어난 운동신경은 추종을 불허하는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온종일 발바리같이 뛰어다녀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런 그가 병원에 있다는 비보는, 기린고교의 일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친구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진심. 아직도 저릿할 만큼 생생하다.

창가에 닿은 병상에서 친구들은 부러진 손을 내려봤다. 애써 웃는 녀석의 모습이 참 아팠다. 오랜 시일이 걸릴 듯 싶었다. 다시 뛸 수 있을까. 회의 섞인 목소리마저 나왔다. 허나 ‘불행’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는 없었다. 그의 생명력이 보란듯이 악천후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상경한 스무 살에는 서쪽에서, 숨 쉬듯 탄식하던 스물넷에는 남도에서, 이제는 동해의 소도시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카바이드 등불처럼, 옛날 같은 대화가 수화기 너머로 흐른다. 남들이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를 독려하기도 하는데, 나는 한두 번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누가 너를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으로 보겠느냐고. 그리고, 그래서, 자랑스럽다고. 한마디를 멋쩍게 덧붙인다. 틈만 나면 자기연민의 수렁에 빠졌다. 기질적으로 삶을 점멸하는 별빛이라고 여겼지만, 나는 반짝이는 광원이 아닌 캄캄한 밤하늘을 응시했다. 한때는 낙엽같이 일상이 부서져서,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떠민 적도 있었다. 손은 허우적대는 나를 밤바다로 이끌었다. 오래도록 응축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음성이 너무나 컸는지, 어느 행인은 바다에 누가 빠졌느냐고 묻기도 했다. 맞다. 그때 바다에 버리고 온 것은 자기연민의 보따리였다. 나는 뒤늦게나 알았다. 이제 손은 사회 초년생이 된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윤기 있는 삶의 조건을 세 가지로 꼽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언뜻 보면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스무 살부터 줄곧 말해왔던 눈부신 희망을 또 한번 관철시키는 손의 모습을 보며, 삶은 비관하는 게 아니라 긍정하는 것이란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손의 합격 소식을 듣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있다. 2012년 솜눈이 내린 겨울밤. 저녁잠으로 노곤을 풀고 나서 울린 전화벨. 그때도 손은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대학에 붙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때도 그랬듯, 내 일인 마냥 기뻐하는 나를 마주하며, 손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를 느낀다. 그간 고생 많았다. 그리고 고맙다, 우리 영수.

작가의 이전글L의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