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억

울보와 꼴통

by 팔레놉시스

충무로의 겨울이다. 술국집은 농담의 해방구이고, 우리는 근면히도 떠든다. 창밖 골목은 쩡쩡 얼어붙는데, 분위기는 자꾸만 무르익고,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축인다. 석 장의 풍경이 겹쳐서 나온 물음은 이런 것이다. ‘너넨 인생의 첫 기억이 뭐냐.’ 형은 울보였고, 나는 꼴통이었다. 아버지는 매를 들고 우는 놈과 말썽 피우는 놈 사이에서 늘상 고민했다. 꼴통을 혼내면 울보가 울면서 감쌌기 때문이다. 형은 자주 울어야 했다. 흘린 눈물이 양분이 됐는지, 형은 군대에 가서도 키가 자랐다. 마을 어른들은 형이 장골의 큰외삼촌을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해군 제복을 차려입으면 흐뭇할 정도로 태가 났다. 말쑥한 그를 향한 뭇사람들의 찬사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옛날집 흙마당. 빨간 벽돌로 만든 아궁이와 일가친척이 몰려도 끄떡없는 시커먼 무쇠솥. 매캐한 연기를 쿨럭쿨럭 뿜어대는 회색빛 굴뚝. 기억의 첫 장에서 나는 장난감 포클레인을 타고 있다. 손으로 밀고 놀아야 할 장난감에 엉덩이를 들이밀었으니, 노란 플라스틱 포클레인은 이내 작살이 난다. 그때쯤 마루 쪽에서 눈초리가 느껴진다. 일곱 살 형이 보인다. 앳된 형은 성내지 않는다. 울음이 많았지만 심성이 깊었다. 형은 교복을 입고 고주망태가 된 내게 엉성한 날아차기를 먹이긴 했지만, 내가 머리털이 굵어진 시점부터 좀처럼 성내지 않았다. 아직도 ‘존중’이란 단어의 힘을 믿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형 덕분이다. 부족한 나를 향한 그의 믿음은 여전히 나의 자신감이다. 일 년 전 결혼식장에서 입술을 움찔거리면서도 울지 않았던 형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노라고, 언젠가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그 다웠다. 세상 환한 형수는 식장에서 울음 많은 시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그날만큼은 울지 않았다. 돌고 돌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첫 기억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 밥벌이에 지쳐도 형과 누나는 가끔 오는 동생들의 끼니를 챙긴다. 지난 주말 그들은 늦은 점심을 준비하면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늦잠에서 깬 나는 겨울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리며, 울보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작가의 이전글걷는 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