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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Jun 26. 2022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떤 색깔인가요?

 내려놓음

  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일, 살을 30kg 감량하는 일, 명문대학교에 들어가는 일, 서울에 아파트를 구매하는 일 등 다양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어렵고 외면하고 싶은 일은 죽음입니다. 위에 일들도 힘든 일이지만 살아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죽음을 떠올리면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의문이 들게됩니다. 죽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만 살아생전 죽음과 같은 어려운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려놓음입니다. 다른 말로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은 무슨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나요? 대게 우리는 과거 안에 갇혀있거나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과거의 내가 이렇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몇 살까지 살아남을까? 미래에 나는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까? 상실된 오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는 허우적거림 속에 허비됩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을 예로 들어 비유해주셨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하여 상사에게 다소 심한 질책을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화살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부처님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의 본능이라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화살은 무엇이냐면 고난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블랙홀 속에 빠져 살아갑니다. 이미 엎질러져버린 사건을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와 부정적인 생각안에 갇힙니다. 부처님은 두 번째 화살이 내게 날아왔을 때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실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잘해야 해!, 다시는 실수하면 안 되라는 강박 또한 위험한 덫일 수 있습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인 겁니다.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세요. 대부분 너무 의기소침하거나 너무 과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충분한 삶을 살아감에도 무언가를 더 바라거나 욕망합니다. 충분히 부딪혀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스스로를 믿지 못해 쉽게 포기합니다. 우리가 그 과정 중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나는 왜 매일 도전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릴까? 나는 왜 이리 게으를까? 무엇이 원인이고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정말이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옵니다. 우리에게 들이닥친 문제의 크기는 앞에서 이야기한 죽음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어떠한 대처를 하든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다는 말이죠(웃음).


그렇다고 어피 죽을 인생 될 대로 되라지와 같은 무책임한 통찰과는 다릅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를 가둔 고통에서의 해방입니다. 생각을 전환하고, 행동을 달리한다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까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유사합니다. '우리는 생각이 아닙니다.'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이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일까? 를 생각할 때면 머리가 더 아파왔습니다. 생각의 전환을 해보고, 다른 행동을 해보고, 긍정적으로 살자 다짐하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고통의 끝은 어디인지 까마득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삶의 고뇌가 들 때면 이 순간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노력과 의지의 끝이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나의 어떠한 힘으로도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혼'이라는 것을 처음 마주하게 됩니다. 영혼은 생명입니다. 영혼은 창조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으며 죽어있는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습니다. 신은 사람에게 마법과 마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속임수와 허구 대신 영혼과 영혼의 교제 안에 자신의 능력 일부 부여해주었습니다. 우리는 현실 안에서 사랑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존재입니다.


변화는 생각이 아닌 삶으로

  저에게 가족과 집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엄마가 살아있음에도 나의 집이 떡하니 있음에도 그것은 나에게 불편한 무언가 였습니다. 집에만 가면 게으른 생활패턴 속에서 구성원이라는 저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해 주는 밥 먹고 TV 보고 게임하고 자고 이것이 제가 집이라는 곳에서 한 모든 일과입니다. 엄마 또한 저에겐 늘 낯선 이방인 같았습니다. 나의 엄마가 아닌 것 같았죠.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문제도 있었지만, 저는 최근에서야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문제였죠. 일상에서의 부딪힘이 없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고, 저는 가급적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에서 회피했습니다. 밥을 할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쉼을 가질 때도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정성을 쏟지 않았죠. 같은 공간에서 살아갔지만 역동적인 부딪힘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도피했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근본입니다.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것이 관계의 전부는 아녔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숨결로 부딪히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대화법으로 끊임없이 소통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간 날이었습니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엄마가 앉아있는 위치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습니다. 무언가 허전하여 뒤를 돌아보니 나를 바라보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껏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한 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달라지니 가족이 달라지는구나 문제의 원인이 나라는 걸 깨달았죠. 장엄한 말보다 더욱더 감격스러운 마음의 울림이었습니다. 영혼이 하는 일은 이와 비슷합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텔레파시 같으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찰나에 찾아옵니다. 저녁 5시 부터 밤12시 까지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모닥불 아래서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서로를 잘 알고있다 믿었는데 사실 서로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하려면 눈치보는 신경전부터 종결해야 합니다. 부딪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옛날과 다른 삶의 패턴 속에서 지금도 싸우기도 많이 싸우지만 우리는 부딪혀나갑니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식적인 껍데기를 까고 일상이라는 공기를 들여 마십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또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산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사를 할 때나 집을 청소할 때나 집에서 요리를 할 때나  돌아보니 나는 정말 하나도 관심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귀찮음도 있지만 그보다 큰 원인은 역시 부딪히기 싫어하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가족들 간에 치유가 진전되며, 작은 부분이지만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죄책감을 덜어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간 내가 잘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담아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해 나갈수록 저 또한 집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날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교회의 한 부분마다 나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자리는 없다.라는 말이 이제야 깨달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뒷마당에 나무를 심고, 앞마당에 자갈을 정리하고 뒷마당에 축대를 쌓으며 나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뿌듯함을 넘어, 나의 집을 가꾸는 즐거움에 매료되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을 인식하고 느끼고 바라보는 '영혼'이 변화됨을 체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생각함으로써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낸 일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참아가며 변화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순종하고 흘러가는 삶의 몸을 맡겼습니다 . 오히려 어떻게, 무엇을 이라는 나의 욕심과 의지를 내려놓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변화되었습니다. 숙해지기 위해선 고난과 역경을 참아내야만 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감정을 잘 조절해야지와 같은 많은 욕구들이 그 시간 침묵했습니다. 사실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던 영혼과 만났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던, 어떤 행동을 하던, 어떤 느낌을 가지던 영혼은 그 자리에 존재합니다. 그로써 완벽하고 온전합니다.


현존

  잘 상기시켜보면 불교와 기독교 또한 같은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르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가르침은 똑같습니다. 직위가 높다고 잘 나가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죠. "그 누구도 내가 깨달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도 낮은 자가 깨달음의 은혜에 도달합니다. 공통된 특징은 자격과 조건을 요하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욕구와 본능들을 절제함으로써 비로써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영혼과 마주칠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이성, 느낌의 파동은 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건강한 파동을 유지하며 잔잔하게 울릴 것입니다. 자격증과 같이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놓아주는 길이 평온에 시작 일 것입니다. 가족은 외부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인형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살아가며 부딪히는 마찰은 당연한 것이며 부처님이 말한 첫 번째 화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단연코 받아들임과 현존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숨지 마세요. 그저 순리대로 행동하십시오. 노동을 통해서든 업무를 통해서든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서든 지나가는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감정을 통해서든 현존해있으면 치유되는 일입니다. 깨달으려는 욕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더욱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현실에 좌절하게 됩니다. 어느 것이 욕심이고 어떤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하는지를 분별할 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사슬과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초조함에서 벗어난다면, 현존하고 있는 영혼과의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평온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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