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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Jun 21. 2022

타인은 나의 거울입니다.

분노와 투사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 중 유독 보기 싫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모든 행동이 거슬리고 불편한 사람 말이죠. 아무리 무시하고 외면하려 해도 보기만 하면 짜증이 솟구칠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 분노는 무엇일까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존재하듯이 우리 내면 안에 있는 이유를 분석해봅시다.


누구나가 완벽하진 않으며 자신의 약점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나의 단점과 미흡한 부분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죠.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지 않으며 만들어진 나의 모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와 대화의 방식, 성격 등은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 보고 배운 것들입니다. 나 혼자 창조된 독립적인 생물이 아니며,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 피부로 와닿는 일상에서 부딪히며 내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내가 배우고 닮고 싶은 것들은 습득하, 좋지 않은 것들은 분별하여 배출시키며 우리는 점점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가죠. 하지만 우리는 보통 큰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누군가에 영향 없이 나 홀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존재라 오해하죠.


이유 없이 화가 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타인의 미운 모습들이 나와는 다르게 격식이 떨어진다거나 모자란 부분으로 비추어져 분노라는 감정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나의 감추어진 연약한 모습이 타인에게 비치어졌을 때 무언가를 들킨 분노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인력 사무소에서 관계 맺은 형과 대화를 하며 끊임없이 불편함을 느껴졌습니다. 저 형이 내게 실수하거나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 형의 고집 센 자존심과 자기 말만 맞다는 식의 대화방식에 크게 화가 났습니다. 결국 분노는 터져버려 큰 화를 내게 되고 형과의 관계는 끝이나 버렸죠.


나의 감정을 돌아보니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내가 믿고 있던 가치가 공격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을 벌라면 누구나가 꿈꾸고 있는 대기업에 들어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꿈꾸는 비전 또한 다릅니다. 돈을 한 달에 천만원을 벌어도 한 달에 900만 원을 소비한다면 200만 원을 벌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 말할 수 없죠. 이와같이 삶의 질을 돈의 부유함과 가난함으로 측정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꼈습니. 결정적인 한방은 대기업에 다니지 않는 중소기업 사람들의 인성을 가지고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표현방식에서 터져버렸습니다. 너도 인성이 좋아지려면 대기업을 꿈꾸며 노력해야 한다는 일침이 저의 감정을 건드렸죠.


누가 들어도 화가 날 만한 발언이긴 했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거나, 그냥 가버렸어도 되는 상황이었죠. 저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변명을 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옳은 건 나이고 당신은 잘못된 가치를 쫒고 있다는 말을 장엄하게 쏟아내기 시작했죠.


자 여기서 누가 맞고 틀린 걸까요? 감정을 내려 앉히고 생각해보니 나 또한 저 형의 고집과 같은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죠. 타인의 말은 듣지 않으면서 나의 말만 옳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주 흡사했습니다. 형이 저런 생각을 가지기까지는 형만의 스토리와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삶의 환경에서 살아왔으며 추구하는 이상은 다를 수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삶의 방식이 옳은가는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화가 난 이유는 '나의 생각만이 정답이다' 라며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태도에서 온 것이였죠. 분노는 대게 이런 것입니다. 타인이 나에게 잘 못해서 생긴 합리적인 원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수치와 연약함을 건드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부정하므로 방어하기 위한 샤우팅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이 또한 화를 내봐야 알게 되는것 입니다. 표출하지 않고서는 공격적인 분노가 잘 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나의 의사와 생각들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못 것입니다.


공감과 사랑으로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사람의 살아온 일생을 통틀어 들여다봐야 이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단편적인 저 사람의 말과 행동을 가지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화가 난다면 내가 저 사람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고, 나 또한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요.


이것을 저는 공감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대게 공감이란 나와 비슷한 취미, 생각, 가치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느껴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취미와 성격 생각들을 하고 있어도 공감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와 닮은 점이 있어서 저 사람을 좋아하고 신뢰하는 건 그저 표면적인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저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전성입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 간의 공감은 상상하기 힘든 맥락이죠. 하지만 착함과 나쁨이라는 딱지를 떼어본다면 사람이라는 공통된 무언가가 분명 존재합니다.


현재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누구나 살아오면서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족 또한 개인의 다른 경험 간에 결합과 타협이지 않을까요? 타인과의 관계 또한 가족처럼 남과 남이 만나는 일입니다. 남과 남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갈등과 부딪힘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죠. 그 과정을 성숙하게 견뎌내야만 우리는 공감이라는 아름다운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겪은 아픔과 상처만큼 저 사람도 사연이 있구나. 나는 요리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지만 저 사람은 운동과 요리를 못하는 대신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내가 잘하는 건 나누어 주고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배울 수 있는 것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겁니다.


공감의 시작은 무엇보다 경청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죠.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분노라는 감정 또한 내 이야기는 안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만 떠들어댈 때 나타나듯이 말이죠. 조언과 피드백은 좋지 않습니다. 들어만 주어도 타인의 마음은 열리고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의 최근 경험을 빗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나온 중학교 친구들에게 졸업생으로서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보통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무언가를 받는 사람이라 생각하죠. 제가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후배들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2-3시간 들어줄 수 있는 자리는 결코 흔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의 과거를 정리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시간은 삶의 있어 가장 중요한 공부였습니다. 사랑을 주는 것만큼 수준 높은 공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 또한 받은 사랑이 많아 받은 사랑만큼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감사함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므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놀라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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