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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Jul 08. 2022

자극

자극적인 삶

  가끔 삶이 너무 무료할 때가 있다.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특별히 좋은 일도 없는 순간이면 말이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평온함이 있는 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상태가 가장 불안한 순간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나는 항상 자극을 추구했다. 요리에 MSG를 첨가하여 맛의 풍미를 더 해주는 것과 같이 삶에도 MSG를 첨가하듯 자극적인 무언가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별의 아픔이 없다면 사랑은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죽음이란 슬픔이 없다면 탄생이란 기쁨 또한 없을 것이며, 고난 없이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고통과 행복, 죽음과 탄생, 이별과 사랑은 사실 하나의 속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헤어질 염려가 없다면 서로에 대해 무엇이 더 궁금할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연애하기보단 헤어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처럼 이별을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 사랑의 실체라 봐도 무관하다. 한 사람의 생애 또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시한부가 주어진다. 우리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골인지점을 목표로 살아간다. 우리의 불행은 대부분 고난과 고통 죽음과 이별을 외면하므로 생겨난다.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일상의 스트레스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몰두하며, 하루 밤의 달콤한 꿈을 위해 클럽을 찾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고통스럽고 불안했던 적이 있을까? 고난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자극적인 무언가로 고난에서부터 도망치기만 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라는 곳은 자극적인 무언가를 계속해서 상품화한다.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의 카페와 레스토랑, 독특한 감성을 자극하는 술집, 특이한 기능이 탑재된 전자기기 등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통해 고통을 잊는다.


사회는'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극뿐이라 가르친다. 내가 얼마나 찌들어 있는지는 간단하게 체크가 가능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보는 것이 그 방법이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멈추고 가만히 있어보면 나와 같은 공감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이 시골 할머니네를 가서 겪는 따분함처럼 불안이라는 불씨는 스멀스멀 올라온다. 보통 나는 그걸 지루하다, 심심하다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불안한 것이다. 스마트폰을 일주일 간 내려놓고 살아본다면 불안의 실체를 가장 간접적으로 체험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삶의 고뇌를 하게 되며, 우리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세계로 빠져들게끔 설계되어있다.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를 심도있게 고민하는 듯 하지만 우리는 깊어지고 무르익는 시간 대부분을 견뎌내지 못한다. 삶과 죽음,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은 어떠한 기술력으로도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모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한순간의 통찰로서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무수한 생각들을 정리함으로써 명확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삶의 이유에 대한 답을 빠르게 찾고 싶어 한다. 또한  어려운 답이기에 어차피 죽는다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오류에 빠지기도 쉽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일주일을 굶고 밥을 먹어본다면, 이틀 밤을 지새우고 잠을 자본다면 그 순간 먹는 것과 자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되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일주일을 굶는 과정과 이틀 밤을 지새우는 과정이 있기에 그 순간이 우리에게 행복한 것이다.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고 비싼 음식이 앞에 있어도 쳐다보기 싫은 것처럼 말이다. 깨달아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깨닫고 싶어 하며, 고통 없이 행복하고 싶은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이지 않을까? 조미료는 자극적이며 자극적인 맛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인스턴트식품에 맛이 들려버리면 그것들을 끊임없이 원하는 우리의 욕구가 얼마나 지배적인지 다들 공감할 것이다. MSG를 투여하여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건 쉬우나 조미료를 쓰지 않고 식자재 본연의 맛으로 인정받기는 힘든 일이다. 더욱더 맛있어지기 위해 투여하는 조미료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 또한 불안과 고통을 잊기 위한 마취제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건강한 자극

  우리가 자유라 착각하며 일탈로서 즐기는 삶의 형태는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의 자극적인 무언가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이 불안하다면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증거일 수 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마취제를 투여하지만 마취가 풀리고 나면 고통스럽듯이 우리는 '자극'이라는 마취제를 투여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병자이다. 하지만 나는 삶에 있어 자극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제 것 투여해온 고통을 없애는 마취제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겨나가는 과정의 자극을 믿는다. 삶에 있어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만물의 진리와 지혜들을 전부 알아버린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허무할까? 정답을 찾아 헤매지만 정답은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하다. 모름으로써 신비롭고 알아가므로 보람찬 무언가 말이다.


실제로 자신의 문제를 아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보다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 훨씬 쉽다. 자신의 문제가 이것 때문이라고 아는 사람의 가장 큰 딜레마는 알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에 있다. 머리로 알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해결 가능한 문제라 착각을 하거나 알면서도 안 되는 현실에 크게 좌절한다. 생각과 말로는 아는 듯 하지만 삶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모르는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인생에 교과서 같은 책들과 수많은 명언들이 난무하는 오늘날에 머리로만 아는 것이 전부라면 누가 고통스럽고 괴롭겠는가? 이렇게 살아보라고 가르쳐주고 제시해주는 방향은 많지만 그 방향 데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다. 우리는 지식을 습득했다고 믿지만 지식이란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 영향가 없는 허구에 불가하다. 반면 나의 문제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앎으로서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큼 겸손한 일도 없을 것이다.


자극의 시작은 공허함에서 부터 왔으며 자극이란 공허상태에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공허함과 무료함을 초월하여 이겨내는 방식의 성장이 아니라 우리는 건강한 자극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건강한 자극이란 문제에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삶의 현장 안에서의 변화를 뜻한다. 게임은 현실이 아니고, 찰나에 감성을 자극하는 술집과 놀이문화는 되레 현실과 멀어지는 망상을 꿈꾸게 한다. 주변에는 현실에서 도망치라고 속삭이는 수많은 유혹들이 존재한다. 그 유혹들이란 달콤하고 재미있으며, 충동적이고 화려하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 않으며 정당하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을 탓하거나 유행을 뒤쫓아가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 다른 삶을 갈망하고 찾아내며 살아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모든 것들을 우리가 조절하며 적당히 할 수만 있다면 괜찮겠지만 세속적인 자극을 쫓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넘어지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자극적인 무언가로 우리의 불안을 치유케 해주는 화려한 문명들은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 유혹들을 하루하루 이겨나가는 과정이 우리에겐 참으로 중요한 인내의 과정이다. 인내의 끝에서 우리는 공허함을 채울 호기심과 땀 흘리는 열정으로 삶을 계획하고 변화시키며 건강한 자극을 만들어낼 것이다. MSG가 아닌 재료 본연의 나를 통하여 더욱더 풍미 가득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날을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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