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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Jul 09. 2022

딱 한 명만 있으면 돼

우울증

  학창 시절 때를 추억하면 잘 나가는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고단하게 노력했었다. 그 무리들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과 같이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어린 나이에 모자람이라 추억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로 인해 우울해지고 외로워질 적이 많았다. 외로움과 우울증을 나는 일종의 질병이라 보지 않는다. 당장 집 밖을 나가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지인이 아닌, 그저 '남'이라고 인식되는 어색한 사람들 말이다. 또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 본다면 소속된 공동체가 우리에겐 작은 세상이 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이 현재 우리 삶에 만족도를 좌지우지한다. 우리는 그 틀 안에 있기에 따듯함을 느끼지만 반대로 그 안에 있으므로 답답해질 적도 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도 우울함과 외로움은 찾아온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건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의 시야는 한 없이 좁아질 것이다. 우울증과 외로움은 그 두 가지가 공존할 때 발생되는 감정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없을 때, 누군가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을 때 오는 일종의 공황과 같다. 나 지금 우울해라는 표현을 해석하면 '난 지금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어' , '도무지 나 혼자 외로움을 이겨나갈 수 없어.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어'와 같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다소 짜증 섞인 공격적인 태도일지라도 내적으로 갈망하는 언어는 분명 이러할 것이다. 우리는 관심받길 원하며 사랑받길 원한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연락해서 힘들다 말하면 저 사람이 귀찮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친절함이 우리의 장애물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저 사람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거라며 부정적인 판단을 스스로가 내리고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가다가 손이 미끄러져 컵이 깨졌다고 가정해보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민망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남들이 인식하는 문제의 크기는 '컵이 깨졌구나' 정도다. 내가 두려운 건 컵이 깨진 상황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라는 평판에 있다. 하지만 정작 타인은 컵이 깨진 상황에만 반응하지 컵을 깨트린 사람을 좋지 않은 사람이라 평가하진 않는다. 우울증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뿌리는 이와 같다. 다가가지 못하는 두려움이자 세상에 주인공은 나뿐이라는 이기심이다.


가면

  '세상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아'라는 말은 '세상 누구에게도 나의 민낯을 보여주기 싫어'와 같다. 우리는 약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감추고 싶어 하며, 잘하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주길 원한다. 주변에 친구들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움을 느낄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편안한 것은 우리가 민낯으로 있기 때문이다. 두꺼운 화장을 하고 밖을 돌아다니다 집에 와서 화장을 지우고 난 후가 상쾌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항상 두터운 메이크업을 하고 사람을 만난다. 하고 싶은 말들은 속 안에 담아두고 해야 될 것 같은 말들을 꾸며내느라 바쁘다. 모든 사람에게 나의 민낮을 당당히 보여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이에게도 나의 민낯을 보여줄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묻혀둔 '진실'은 반드시 문제 일으킨다. 무언가 허전하고 공허하고 외로워지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같이 민낯으로 만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다면 우울증은 많이 호전될 것이다.


민낯을 보여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연애할 때를 떠올려보면 처음 만나는 남녀는 설렘이 있다. 점차 서로를 알아가며 설렘이 없어지는 듯 하지만 경계가 풀리므로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설렘이란 그저 자신의 민낯을 감추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오는 긴장감일 수 있다. 설렘이 없다면 권태가 오고 권태가 오면 이별을 고민한다. 권태의 시기에 이별을 하는 연인도 있지만 권태라는 시기를 극복해나가며 더욱 가까워지는 연인도 있다. 나의 가식은 발견하기 힘들지만, 타인이 나에게 가식적으로 행동하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단번에 파악한다. 권태란 타인이 나에게 민낯을 언제쯤 보여줄까를 기다리는 답답함이다. 사랑이 식어버린 무미건조함이 아니라 되래 '진심'을 기다리는 애달픈 시간이다. 우리는 연애하듯이 세상을 살아가면 된다. 모든 이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진실된 욕구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단 한사람만 있다면 외롭지 않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없어서, 한 사람에게도 나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이다. 나는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성숙하게 달라진 모습보다 그때 그 모습일 때가 편안하고 반갑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순간에나 민낮으로 만날 수 있는 한 사람은 분명 당신 옆에 있을 것이다. 그 관계는 우리도 모르게  오랜 시간 숙성시키며 맺어 온 관계이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감사한 관계이다. 편안한 관계가 권태가 오듯 당연하다고 느껴지고 지루해질 때 우리는 외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감사함을 잃어버린 오늘 날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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