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온몸을 나에게 실었다.
다음날 진료가 있어 서울로 올라온 2022년 어린이날 늦은 오후 그는 집에 들어서는 길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그득히 받아놓고 따뜻한 온수에 몸을 담갔고, 나는 그의 등과 팔다리의 때를 밀어주었다.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더운물 목욕을 하는 동안에는 편안하다고, 살 것 같다고, 아프지 않다고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네 식구는 둘러앉아 기분 좋게 저녁을 먹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단호박찹쌀죽을 먹었다.
이른 아침 주방에서 나는 그릇소리에 깨어 나가 보니 그가 혼자 단호박찹쌀죽을 먹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밤새 와들와들 온몸에 떨려오고 몸살이 나서 새벽부터 깨어있었다고 했다. 뭐라도 먹으면 낫을까 싶어서 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고 침대에 앉았어도 춥다고 했다. 집안의 온도는 28도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토를 했다. 항암치료를 한 3년이래 처음 토했다. 아무리 속이 울렁울렁한 적이 많았어도 토하진 않았었다. 방금 먹은 죽을 화장실에 가서 다 끄집어냈다.
내가 갑자기 몸이 떨리며 그를 붙들고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오전에 진료가 있어서 아들과 함께 우리 셋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그의 생전 처음으로 휠체어에 태우고 아들이 밀었다.
진료 2시간 전 혈액검사는 필수코스였다. 다시 휠체어를 밀어 주차장의 차 안으로 돌아왔다. 차량 뒤좌석에 비스듬히 기대 앉히고 진료시간을 기다렸다.
주차된 차옆에 세워놓은 휠체어를 자꾸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가져가 아들이 여러 번 차에서 내려 저희 거예요 소리쳐 말하며 가져왔다. 다시 진료실 복도로 올라갔다.
응급환자 때문에 진료가 지연된다는 문자가 휴대폰에 떴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의 온몸을 감싸다시피 안고 진료실 앞에서 이름 부르기를 기다렸다. 내 몸에 안겨있는 그의 몸은 따스했고 그는 내 앞섶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박교수는 놀라며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가고 물으며 내일 입원하자고 했다. 지금 당장 입원시켜 달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마지막 항암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냐고 물었다. 박준용교수는 나와 아들에게 내일 입원하면 퇴원을 못할 수도 있다고, 입원기간이 일주일? 열흘? 길어서 한 달 일수도 있다고 태연히 말했다.
일상생활을 이렇게 갑자기 못하게 된 것이 환자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항암치료를 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울면서 항변하는 나에게 박교수는 환자분 암진단받고 아무런 치료도 안 했으면 6개월도 생존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이 담당주치의인 본인의 치료 덕분이라는 건가.
삶의 질이 바닥을 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동안 버텨온 3년의 세월이 갑자기 무의미로 나를 휘감았다.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옆집아저씨를 만났다. 서로 인사하며 13층까지 올라가는데 그가 내손을 꼭 잡았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나에게 의지하며 타인에게 마지막까지 평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그의 강철 같은 의지가 내 몸에 미쳐왔다.
빨리 침대에 그를 편히 누이고 싶었다.
나의 전화를 받고 당장 집으로 찾아온 심형부부에게 그는 형님, 형수님 와주셔서 고마워요.라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했다.
진통제를 먹고 깜빡 잠들었던 그는 깨어나 무언가를 먹겠다고 하며 거실소파로 나와 앉았다. 처음으로 그에게 죽을 떠먹여 주었다. 내일 오전이 입원이었지만 점점 더 안 좋아지는 상황에 119를 불렀다. 코로나19 규정상 보호자는 한 명밖엔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내가 따라오지 못하게 했고 아들과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 홀로 누워있는 나에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스피커폰으로 그와 나 그리고 아들이 함께 의사와 대화하며 치료대책을 상의했다. 의사가 나에게 묻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의식이 없어지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연명치료를 하겠냐고, 울먹이는 나의 말을 듣고 그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모든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말은 못 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2022년 5월 6일 밤 11시였다.
그날밤, 내 곁에 누워 자겠다는 며느리를 다른 방으로 보내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남편과 아들, 며느리를 내가 이끌어야 했다. 이상하게 높뛰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았고 나는 입을 악물고 괜찮아를 연발하다 얼핏 잠이 들었다.
2023년 3월 29일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