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총체적 화려함 속의 사람들
어김없이 올해 9월 9일에도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북한 건국절을 기념하는 열병식이 거창하게 열렸다. 광장의 바닥에 모인 참가자들의 일사불란한 동작과 각종 무기와 행사도구들을 휴대한 열병대오의 기계 같은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휘황함과 마음을 짓누른 듯한 딱딱하고 육중한 중압감을 준다.
주석궁이 가까이 있는 평양시 대성구역에서 살아온 우리 집은 외국의 국가수반이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면 시민들의 길거리 환영을 받으며 온 평양의 중심거리를 돌고 돌아 금수산기슭의 주석궁으로 향하는 도로선상에 있어서 아침새벽부터 집을 일체 비우고 밖으로 나와 있어야 했다. 우리 집뿐 아니라 환영거리 도로선상에 있는 아파트들은 전체가 다 행사 때마다 그랬다. 아마 저격과 같은 위험요소들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였을 거라고 어른들에게서 들었다.
고등중학교시절 수도 없이 반복되는 김일성경기장에서의 대집단체조행사에도 평양시내 학교들은 의무적으로 학생들을 참가시켜야 했다. 이때에는 몇 달 동안 학업을 중단시켰다.
내가 다니던 룡남여자고등중학교는 대집단체조의 배경대로 동원이 되었는데 배경대 좌석에만 들리는 별도의 방송과 맞은 켠 주석단 오른쪽 위쪽에 설치된 전광판의 숫자를 보면서 배경대 총지휘자의 구령과 깃발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카드섹션을 수행해 전체 배경대 화면에 원하는 그림이 완성되어야 했다. 휴대하고 다니는 배경책은 앉는 위치에 따라서 두께가 상이했는데 보통 40 카드씩이었다. 가운데 쪽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들의 배경책이 많이 두꺼워서 번호가 많았다. 골을 넣는 장면이 있었는데 기본번호가 펼쳐진 가운데 새끼번호 1, 2, 3, 4로 축구공이 골문으로 날아가는 카드섹션 때에는 남학생들이 마지막 4에서 골을 너무 크게 외치며 술렁거려 항상 지휘자의 주의가 있었지만 그때만큼 우리는 모두 신났었다,
배경대 맨 아래쪽 경기장 바닥에서는 담임들이 배경대좌석에 일렬종대로 앉아있는 학급 애들의 오작을 기록했는데 이 오작숫자에 따라 행사종료 후 엄격한 추궁의 시간을 가져서 흘쩍이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행사도중 화장실을 갈 수가 없음을 어린 학생들도 스스로 느끼고 터득해서 행사당일에는 자발적으로 물도 마시지 않았고 음식도 소량을 섭취하곤 했다.
대학시절에도 수많은 거리행사에 동원되었는데 여학생들은 주로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입는 것과 비슷한 한복을 입고 주로 양손 부채춤이나 장고를 메고 장고춤을 추면서 외국수반들을 환영하곤 했다.
스물도 되기 전 처음으로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짙은 화장을 하고 연록의 저고리에 진분홍색 긴 꼬리치마를 입고 남학생들 보기 부끄러워 머리 숙이고 부채로 얼굴 가리며 재빨리 행사장으로 뛰어가던 나나 내 동기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남아있다.
쿠바대통령 피델 카스트로가 오던 날 룡흥 네거리 2. 8 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김일성과 피델 카스트로는 차에서 내려 춤추고 노래하는 우리들의 앞을 지나며 손을 흔들었는데 나는 이때 5m 도 채 안 되는 초 근접거리에서 두 정상을 보았다. 악대는 연주했고 합창단은 “쿠바 씨, 양키 노”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새벽 6시부터 일일이 공민증과 얼굴을 대조당하고 얇은 한복을 입고 행사장으로 들어와 떨면서 어떤 때는 차가운 주먹밥을 한 입씩 베어 먹으며 두 시간 이상의 기다림 끝에 정작 두 정상이 우리 앞을 지나간 시간은 10분도 채 안되었다.
또 대학시절엔 김일성광장에서 열리는 청년학생 횃불행사에도 여러 번 참가했는데 대오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두 개의 횃불을 양손에 들고 구령에 맞추어 주석단 앞을 지나갈 때면 얼굴이 타는 듯했고 혹시 불 찌라도 옷에 날릴까 노심초사했었다.
대오가 주석단 앞을 지나서 광장에서 조금 멀어지면 횃불을 끄고 계속 대오를 유지 한 채 전진만 해야 하는데 끊임없이 잇달리는 대오와 대오가 부딪쳐 사람바다로 아수라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의 집은 광장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광장을 벗어난 대오는 나의 집과 정 반대인 평양역 방향인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므로 행사 때마다의 귀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올여름휴가 때 시골집으로 내려온 아들 며느리와 TV를 보면서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정전협정일인 7. 27을 기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열병식을 치르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며느리가 불쑥 물었다.
어머니, 저런 행사에는 참가 신청을 해서 저렇게 참석하는 건가요?
아들이 풉, 하고 웃으며
아니 누가 저런 행사에 참석하길 원하지?
며느리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하는 말
그래도 본인들이 애국한다고 생각하면서 신청할 수도 있잖아요.
아들이
다 강제로 무조건 동원되는 거지 뭐.
그 애들의 이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들으며 저 화려한 행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만, 아니 수십만 사람들의 몸에 배여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한 조직적 억압과 순종심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만, 수십만 군중 속에서 나를 분리해 이 땅에서 살게 해 준 남편의 하늘빛 속 웃고 있는 사진을 마주 바라보았다.
20세기 이어 21세기 오늘날, 건국 75주년을 축하한다는 평양의 저 화려한 경축행사는 언제까지 이어져 나갈 것인가.
2023년 9월 10일 신관복.
더 씀
이북의 건국절 하루 전 9월 8일에 내 손녀 아가가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랑하는 아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이름 그대로 자유롭게, 슬기롭게 커가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