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자주 들여다보며 가만히 읊어보는 소설가 박경리선생의 유고시집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시 한 소절을 인용해 본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이토록 아름답게 우리 모두의 젊은 날을 절절하게 표현해 준 이 소절을 읽으면서 아프게 벅차오르는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깊은 호흡을 하며 아득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춥고 짧았던 나의 청춘의 한 시절을 생각했다.
1987년 겨울은 내 생애에서 가장 추운 겨울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그해 10월 말쯤 대학생이라면 필수로 거쳐야 하는 6개월간의 교도대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평양의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고사포부대로 동기들과 함께 입소하였다. 그때 내 나이 대학교 2학년, 만 열아홉이었다.
우리는 한 개의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현역군인들이었고 소대는 다시 분대로 갈라졌는데 분대장, 부분대장들은 우리 동기들 중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생이 된 제대군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학교 캠퍼스 내에서는 동급의 학생으로 자유롭게 대하던 나이 많은 동기생들이 하루아침에 냉정한 군대의 상관으로 돌변하여 모든 군대식 예절과 동작이 처음에는 엄청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하였다.
우리는 교도대 군복무지에 도착하자마자 군복을 배급받았는데 분대장, 부분대장과 졸병은 계급장부터 달랐다. 분대장이 빨간 줄 3개로 중사, 부분대장이 줄 두 개로 하사, 나 같은 졸병은 줄 하나로 전사였다. 어딜 가든 상관과 부딪치면 경례를 해야 했고 그들이 앉아있는 앞을 지나치려 해도 경례를 붙이고 지나갈 수 있습니까 를 여쭈어야 했다. 심지어 훈련 중 오줌이 급할 때도 경례를 붙이고 위생실에 다녀올 수 있습니까 를 외쳐야 했다. 승인이 없으면 그대로 훈련을 이어가야 했는데 어떤 여학생들은 참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누기도 했다.
병실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각 다른 동으로 동떨어진 하얀 회칠을 한 단층건물이었다. 온돌이 아니고 벽난로가 있고 벽난로 쪽 밖에 화구 칸이 있어서 남자졸병들이 돌아가며 화구당번을 서며 통나무로 불을 때서 병실 안을 덥히는 구조였다. 그 남학생들도 나와 같은 동갑내기들로 엄혹한 그 겨울 동안 툭하면 제대군인 상관들로부터 매를 맞으며 터 갈라져서 군데군데 빨간 손등을 불어가며 여학생들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였다.
별로 한가한 시간은 없었지만 틈만 나면 우리는 벽난로에 붙어있었고 어떤 여자애들은 너무 가까이 불 곁에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해 군복의 여기저기가 불에 녹아서 시커멓게 우그러져 상관들에게서 보일 때마다 욕을 먹곤 했다. 우리 졸병들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주제비가 말이 아니었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은 간밤의 보초근무였다. 2시간씩 교대로 보초근무를 서는데 그날 밤 보초장으로 임명된 하사들이 근무자들을 깨워 보초막까지 데리고 가 전 근무자와 교대시켰고 그런 날은 병실로 들어와서 깨우는 보초장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들려오는 악귀의 속삼임처럼 들렸다.
실탄으로 장착된 보총을 메고 두 세 사람 겨우 들어설 수 있는 보초막에 홀로 서서 캄캄한 주위를 눈 동그랗게 뜨고 살피며 느꼈던 것은 무서움보다도 얼어드는 발의 시림이었다. 한 시간 지나서부터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저쪽 부대 안쪽에서 보초장의 휴대용 전지불빛이 보이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나와 같은 분대 부분대장으로 하사계급장을 달고 있던 그가 보초장을 서는 날이면 나는 호사하곤 했다. 그가 난로 위에 올려놓아 달구어진 불돌을 품고 와 나의 발밑에 놓아주었고 나는 그 돌 위에 올라가 언 발을 녹였고 작은 불돌을 장갑 낀 손으로 그러쥐고 언 손을 녹였다.
포탄창고 보초를 서는 날이면 보초막도 없는 한 데서 두 시간을 견디어야 하는데 이런 날에 그는 병실을 몰래 빠져나와 보초서는 나에게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꼭 안고 언 몸을 녹여주곤 했고 나는 규정위반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의 앞섶에 얼굴을 묻고 따뜻함을 갈구하고 있었다. 차가운 달빛이 한 덩어리로 서있는 우리 둘을 비추고 그 순간이 있어 나는 춥고 배고팠던 그 나날들을 견디어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간밤에 “비상“이 울리면 군복과 군화를 입고 신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던 우리는 모두 문을 박차고 고사포진지로 내달려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나는 85mm 고사포 3번 수로 적비행기가 나타나면 2번 조준수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어쩌다 조준경에 눈을 갖다 대면 평양의 아득한 불빛들이 렌즈에 확대되어 근접거리에 있는 듯이 보였다.
아, 저기가 평양이로구나, 내 집이 있는 곳은 어디쯤 일가.
무분별하게 외쳐대는 중대장의 악쓰는듯한 구령과 분대장의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수기신호도 그 아늑한 불빛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먼 곳에서 울려오는 둔중하고 나직한 음으로 윙윙거렸고 매서운 추위에도 내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밑이 다가오며 중대에서는 선심 쓰듯이 설 쇠고 오라고 교대로 이틀정도씩 휴가를 주었는데 이유인즉 필요한 생필품들을 거의 못 대주고 있으니 집에 가서 필수품들을 가지고 오라는 의미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휴가 받은 우리들은 환성을 올리며 10월 말에 입고 온 대학생교복을 갈아입고 귀향길에 올랐는데 평양교외의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어가다 추위에 손발, 얼굴과 귀 시리지 않은 데가 없어서 짐 보따리 안에서 세면수건을 꺼내 얼굴에 두르고 가는데 서로 가관의 그 꼴들을 쳐다보며 웃지도 못했다. 아늑한 불빛이 흐르는 평양의 내 집이 있는 그곳을 향해 찬바람을 맞받아 얼굴을 숙이고 걷고 또 걸었다.
교도대기간에 대학의 교수들이 현지에 나와 이동강의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우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강의가 진행되는 날에는 아예 훈련일정이 없이 본인의 침대 매트리스에 앉아 강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꾸벅꾸벅 졸기가 태반이었고 그런 우리들을 보며 교수들은 수업을 이어나가곤 하였다 우리들의 실상을 이해했기에.
춥고 배고팠던 그 엄혹한 1987년 겨울에 열아홉이었던 나와 내 동기들은 한 살씩 더 먹었고 고난을 이겨내는 법을 온몸으로 터득하며 한층 성장했다. 이듬해 4월이 되어 6개월간의 교도대 생활을 이수하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새까맣게 탄 얼굴에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왁자지껄 했다. 그리고 나는 찬 바람 부는 포탄창고 앞에서 보초당번이던 나를 껴안고 있던 그를 떠올리며 건성으로 여자애들의 이야기를 흘리며 웃고 있었고 그는 저쪽 운전석 뒤쪽에서 제대군인 대학생들 무리에 둘러싸여 수선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학기말 그는 교도대 학점에서 낙제점수를 받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그때 그것을 몰랐다.
2023년 9월 24일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