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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Jan 28. 2024

쿠알라룸푸르

휘날리는 태극기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기내 안내방송이 울렸는데 얼핏 알아들었다.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방송이었다. 새벽 3시쯤 되어있었다. 기내 창 너머 아래로 아득히 불빛들이 빛나고 있었다. 캄캄한 밤 쉼 없이 대양을 건너온 비행기가 드디어 이 섬나라의 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피부색이 검고 짙은 남색의 유니폼차림이었지만 머리에 히잡을 쓴 공항 여직원들이 드문드문 입국장 창구 심사대에 앉아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미 4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가라앉은 마음은 이 미지의 도시 쿠알라룸푸르의 입국장에서는 다시 뛰놀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창구의 여직원에게 DPRK 공무여권을 쓱 내어 밀었다. 크고 검은 눈동자가 나와 옆에 선 아들의 얼굴을 말없이 일별 했다. 이 여권을 가지고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의 한 나라였다. 쿵 도장을 찍어주었다.     


손님을 잡으려고 바글거리는 공항 택시들 사이에서 중국어가 통하는 어떤 기사의 택시에 올라 무작정 도시로 향했다. 이제부터 우리 셋은 난민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달리는 도로 양옆으로 가로등이 무수히 흘러갔고 멀리 보이는 풍경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앞쪽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이 섬나라에도 전기가 넘치는 모양이군.      


나만이 이 말뜻을 알아들었다. 툭하면 정전이고 툭하면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 되어 15층 집까지 걸어서 올라 다녔던, 밤이면 길거리 가로등도 아주 드문드문 켜져 있고 특정한 곳을 제외하고 온 세상이 새카만 이북 땅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택시기사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차이나타운인 것 같았다. 새벽 4시임에도 불구하고 온 거리가 휘황하게 밝았고 시끌벅적 사람들은 대낮처럼 쇼핑도 하고 길거리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고 있었는데 온통 중국말이어서 여기가 쿠알라룸푸르가 맞나 싶었다. 역시 인구의 대국에 걸맞게 지구상 어느 곳에든 정착하여 산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12월의 이 도시의 날씨는 찌는 듯한 우리네 여름날씨보다 더 더웠다. 어쨌든 우리는 이 거리에서 마음껏 물어물어 원하는 숙소를 정할 수가 있었고 다음날부터 언어의 구애를 받지 않고 여행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또다시 이 도시를 떠나려고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

나만 따라다녀.

...     


아들을 숙소에 남겨두고 남편과 나는 많이도 다녔다. 이 도시의 거리거리를.

아빠엄마 따라 이 나라에 업무상 출장을 온 것으로 느끼고 있는 아들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숙소에 무료하게 있기가 답답한지 근처 편의점 앞 신문가대에서 중국어로 되어있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항상 관심인 축구리그들의 뉴스를 읽었고 우리가 돌아오면 축구소식을 알려주곤 했다.

나는 아팠다. 이 무더운 도시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열에 떠서 지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려 그가 가는 여기저기를 따라다니다 어떤 때는 도로에 주저앉아서 울곤 했다.

12월의 이 도시는 어려서 배운 열대 기후를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해가 쨍쨍하게 빛나고 있다가도 한낮에 갑자기 대줄기 같은 소나기가 쏴쏴 내려 붓고 금세 또다시 태양이 강렬하게 비치는 날씨가 매일 반복되었다.

이방인들에게 터무니없는 택시비를 부르는 이 도시 택시들을 잡아타고 여러 여행사들을 드나들고, 비자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는 미국대사관 앞을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철조망을 친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면서, 유엔사무소 난민담당 여직원의 미국행보다도 South Korea 행을 택하라는 권유를 들으면서, 열에 들떠서 걸음을 잘 못하는 나의 몸을 이끌고 남편이 마지막결심을 내린 듯 찾아간 곳이 주 말레이시아 대만대사관이었다.     


North Korea 인이라고 했다. 대만으로 가려고 한다고 했다.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남편과 나의 DPRK 공무여권을 또 내밀었다. 한참이 흐른 뒤 여권을 되돌려주며 대만이 아니라 South Korea 행을 택하라고 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그들이 우리들의 여권사본을 그 순간 바로 한국대사관에 전송을 했다는 것을, 이러이러한 North Korea 인 두 명이 대만으로 가려고 여기를 찾아왔다고. 그들 대사관들 사이의 정보체계였던가.     


쏴쏴 대줄기 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숙소로 온 그날 밤 나는 미열에 떠서 헛소리를 치며 온 밤을 보냈다. 내 몸이 엄청난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아침에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가자, South Korea로, 알룩이 아파하는 거 더 못 보겠고 이러다 알룩이 죽을 거 같아서 안 되겠다.

우리 가자 South Korea로!     


일단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아들과, 커다란 트렁크 짐들은 숙소에 남겨두고 남편과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택시를 불러 타고 “South Korea Embassy!"를 또박또박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 North Korea Embassy로 잘 못 태워다 줄 거 같아서.     

도착해서 택시 안에서 내다본 철제 울타리를 두른 대사관건물 앞에서 태극기가 뚜렷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택시에서 내려 철제 울타리 옆에 있는 경비실인 듯한 작은 건물로 들어가 제복 입은 검은 피부의 사나이에게 DPRK 여권을 쓱 내어 밀고 North Korea 인이라고 했다.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 남자의 얼굴이 내 동공에 확대되어 왔다. 


머리를 돌려 고요한 대사관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이 정문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South Korea 땅을 밟는 것이 될 것이다.  앞마당의 태극기가 쾌청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2024년 1월 28일 신관복 쓰다.


더 씀

남편이 기어이 한국이 아닌 제3 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은 이북에 남겨져 있는 우리 가족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훗날 꼭 다시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오갈 수 없는 분단의 나라 이북에 태어난 한 사람의 비극의 결심이었다.

이미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그는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이 분단선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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