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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Jun 30. 2024

암흑(暗黑)

어둠의 세상

  달빛도 없었다. 캄캄한 여름밤이었다. 촉수 낮은 벌건 전등불빛이 희미하게 역사를 비추고 있었다. 철로에 객차와 화물방통을 줄느런히 달고 기차는 시커먼 흉물처럼 정차해 있었다. 남루의 무리가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다가 유리창이 없는 객차 안으로 몰려 올라갔다. 쌀인지, 강냉이인지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뵈는 등짐을 진 젊고 늙은 여인 두셋이 허리를 반 접고 또 객차에 올랐다.

  별안간 부웅--- 기차의 기적소리가 캄캄하고 한산하던 역구내에 울려 퍼지자 삽시간에 온 산지사방이 술렁술렁하더니 정차해 있는 기차 주변으로 어디서 들 있다가 몰려나오는지 와와 사람들로 웅성웅성 들끓기 시작했다. 기약할 수 없는 기차의 출발을 몇 시간 동안, 혹은 밤을 새워가며 하루 낮 동안 기다리던 사람들이 떼 지어 플랫폼으로 몰려나와 서로 밀고 당기며 유리창하나 없는 객차에 오르려고 승벽내기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작은 짐들은 밖에서 구멍 난 객차 창가 안으로 던져졌고, 또 막무가내의 어떤 인간은 그 객차 창문으로 무작정 기어들어가 창가에 앉아 있던 인간들의 머리 위에 충돌하며 쓰러졌다.

  나는 이종사촌동생을 따라 역 담장을 넘어 기차를 향하여 달렸다. 자그마한 보퉁이가 등 뒤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플랫폼에서 철로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종사촌이 나의 두발을 밑에서 받아주었다. 사촌의 손을 잡고 몇 개의 철로를 정신없이 건너 목적의 기차 옆에 도착했다. 어찌할지를 몰라 사촌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사촌이 열차 지붕 위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멍하니 올려다보는 나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 못 하는 스물아홉의 나를 사촌은 지붕 위에 끌어올려놓았다.

  6. 25 때 피난길에 나선 피난민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1997년 어느 여름밤, 나와 이종사촌은 평양발 개성행 열차의 지붕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어서 기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며 악다구니가 들끓는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승무원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통제 불능의 이 객차와 화차의 지붕 위에서 사람들은 제 딴에 서로 줄 맞춰 앉으라고 야단했고, 일어서지 말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자정이 못되어 이 피난민 아닌 피난민들을 머리까지 태운 열차가 드디어 평양역을 출발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암흑의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쏘아보다 나는 무릎을 안고 머리를 묻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일 년 전  뇌출혈로 자리하고 있던 엄마를 몇 달 전 봄에 황해도 평산의 외갓집에 모셔드렸다. 큰 이모네 가서 죽겠다는 엄마의 완곡한 지청구를 누구도 만류할 수 없었다. 나는 직장도, 시집살이도 될 대로 되라고 다 팽개치고 아픈 엄마를 보러 평산으로 가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당국자들이 말하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끔찍한 시절이었다. 전기가 없어 온 나라의 교통은 마비되었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집구석들에서 석유등잔을 켜고 사람들은 때를 끓여 먹었다. 그것도 낟알이 있는 집들에서만. 그래도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장으로 향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직장의 구석구석들에서 사람들은 모여 앉아 하나마나한 얘기를 나누었고 전기가 들어오는 잠깐의 시간 동안 엉거주춤 일들을 했다. 컴퓨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전원이 꺼졌고 입력하던 자료들은 자주자주 저장을 해주지 않으면 날아가버려 하루 일이 헛되었다.

  그래도 직장은 전기가 좀 들어오는 편이어서 퇴근 때가 되면 사람들은 화장실 수도에서 작은 물통들에 먹을 물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전기가 없어 물이 나오지 않는 우리 집에서도 단층마을의 공동수돗가(지대가 낮아서 물이 자연적으로 나왔다.)에서 먹을 물을 길어 15층까지 들고 올랐다. 광복거리나 통일거리 등 변두리 초고층 아파트들에서는 내어 던진 분뇨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굴러다닌다고 직장동료들이 말했다.

  우리 친정집에서는 매끼 강냉이 알을 세어서 한 줌씩 먹었다. 전기가 없으니 물도 물이거니와 난방도 들어오지 않았다.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엄동설한에 직장에서 퇴근한 내 오빠는 출근차림 그대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아침이면 그대로 빠져나와 출근했다. 그 치 떨리는 추위 속에서 아픈 엄마는 날로 더 사지가 곱아들어갔고 봄이 오면 평산 큰 이모네 데려다 달라고 꿈속에서도 말했다.

  나는 친정에 엄마 보러 갈 때마다 10층에서 한번 계단에 주저앉아 쉬고 다시 10개 층을 오르곤 했다. 허공에 매달린 이 냉골의 20층 꼭대기 작은 방에서 엄마는 희미한 얼굴을 하고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곁에 꼭 붙어서 자다가 한밤중에 뒤척임에 눈을 뜨면 달빛에 희미한 엄마의 얼굴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불 땐 아랫목에서 등을 지지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머리까지 사람들의 무리를 싣고 떠난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다음날 새벽 동트기 전에 황해도 평산역에 도착했다. 평산역에서 또 30리 길을 걸어 외갓집에 도착해 엉성한 싸리나무 사립문을 여니 마비된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절뚝거리며 집둘레를 돌던 엄마가 발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나를 보고 서있었다. 초췌한 얼굴로 보퉁이를 등 뒤에 달싹이며 달려가 자그마한 엄마를 담뿍 안았다. 엄마 몸에서 장작불 냄새가 났다. 여름에도 밤이면 아궁이 불을 때는 외갓집 아랫방 아랫목은 따뜻했다.

  그날 밤 따뜻한 아랫목에 엄마와 함께 누워 엄마에게 말했다. 오늘밤이 안 갔으면 좋겠다고. 광명은 하늘나라에만 있을 거라고 캄캄한 허공에 말을 건넸다.     


2024년 6월 30일 일요일에 신관복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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