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1.
1988년, 겨울이 다가오는 11월의 캄캄한 밤이었다. 전동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작은 바늘이 9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종종걸음을 쳤다. 마지막 합동강의가 끝나고 교실에 들러 다음날 있을 강의시간에 제출할 과제물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느라고 한 30분쯤 지체하였다.
지하철 전승역 출구로 나와 하나 건너 하나씩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도로를 직진하면 김대 캠퍼스가 시작되는데 거기서 좌측으로 꺾어 금수산주석궁전에서부터 2.8 문화회관 사거리까지 뻗어 나오는 4차선 도로 중간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마을길이 시작된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외투를 걸친 남자가 한 열 걸음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캄캄한 마을길로 들어서면서 나는 한 절반 뛰듯이 걸었다. 뒤쪽의 발자국소리도 같이 뛰듯이 들려왔다. 성냥갑같이 똑같이 생긴 5층짜리 아파트 2개를 지나 마지막 아파트를 지나면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5층의 우리 집 베란다 창문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코너를 돌아서 아파트 현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순간 뒤쪽에서 내 팔을 휙 한번 건드리며 "저기요!" 하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악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제 편에서 놀라 멈칫하며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쪽이랑 말 좀 나누고 싶어서 지하철 안에서부터 쫓아왔습니다. 잠시만 시간 좀….”
남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서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창백하게 흰 얼굴에 순한 눈망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건설건재대학 학생입니다. …… 봉화역에서부터 처녀동무를 보고 내가 내 마음을 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 나도 모르게 따라왔습니다. 하…, 한 번도 내 마음이 이런 적은 없었는데, …… 통성명이라도 하면 안 되겠습니까?”
남자는 아까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좀 안 됐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저 애인 있어요.”
“…………”
나는 할 말을 잃은듯한 그 남자의 크고 순한 눈망울을 대담하게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세 번째 계단에서부터는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에 밤에 집까지 걸어 올라갈 때면 계단복도에 전등이 하나도 없이 캄캄해서 어디서 도깨비라도 불쑥 나와 덮칠까 봐 덜덜덜 떨리던 마음이 오늘 밤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5층까지 나는 듯이 올라 복도창문으로 아파트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의 남자가 아직도 우두망찰 하고 서있었다.
할머니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방 오냐고 출입문 앞에서 나를 맞아주신다. 집에 태수(泰秀)가 와있었다. 태수는 내 오빠와 윗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 밤에 어쩐 일인가는 표정을 지었다. 태수는 마주 바라보며 빨리 밥 먹으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랫방 한 구석에 상보를 덮어놓은 네모난 작은 상에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방금 길가에서 있었던 일을 슬금슬금 이야기했다. 처음엔 무서운 마음이었다가 정작 마지막엔 상대가 측은한 마음이었다고. 빨래를 개키던 엄마가 이 대목에서 불쑥 핀잔을 한다.
“이 계집애, 그러기 공부 끝나면 얼렁얼렁 다니라고 했지. 그러다 나쁜 자식 만나면 어칼라고.”
할머니가 내 곁에 다가앉으며 쯧쯧쯧 혀를 차며 윗방을 건너다보며 한 말씀하신다.
“에구, 우리 신 씨 여자들은 얼굴이 고와서 그런가, 니 막내고모 체니 때도 그런 놈팡이들 가타나 이 할미 속 수태 태웠는데, 어 태수야, 우리 지아(智娥) 건사 잘해야겠다, 잉”
“할머니, 어머니, 마음 턱 놓으세요, 지아는 제가 지킵니다.”
태수가 책가방을 들고 아랫방으로 나오며 나를 보고 눈짓한다. 할머니가 따라 일어서신다, 태수를 바라보는 눈길이 대견함을 감추지 못하신다. 주름은 많아도 인자한 얼굴에 틀니를 빼놓은 입이 호물 딱하게 웃고 있다.
“ 어 그래 태수야, 지하철 끊기기 전에 가야지, 너무 늦어서 어카니?”
반달이 하늘중천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태수는 될수록 느릿느릿 마을길을 걸었다. 둘 다 말이 없다. 늘 그러하듯이 내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우리 동네 이름이 왜 용흥동인지 모르죠? 옛날 옛적에 동네 한가운데 커다란 늪이 있었는데 비가 많이 내릴 때 이 늪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대대로 내려왔대요. 조선시대 때 그래서 동네이름이 용흥동이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승천한 용이 바라본 북쪽을 용북동이라고 하고, 머리를 돌려 바라본 남쪽을 용남동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네요. 동네이름 멋지죠?” 태수는 응 하고 또 말이 없다.
마을길 중간쯤 가장자리에 장정 셋이 손 맞잡고 아름을 벌려야 잡을 정도로 굵은 버드나무가 가을 끝에 잎을 모두 떨구고 회초리 같은 기다란 나뭇가지를 차가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장승처럼 서있었다. 태수는 내가 팔을 끼고 있는 채로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창문의 벌겋고, 희뿌연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차가운 달빛이 버드나무 밑의 한 덩어리 된 두 사람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짧은 포옹 끝에 나는 지하철이 끊기면 어떡하냐며 태수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태수는 아쉬운 어조로 내일 학교가 파하면 자기 집으로 가서 식구들과 같이 저녁 먹자고 말했다.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으면 태수가 그냥 그 자리에 바위처럼 서있을게 뻔해서 그냥 응하고 말았다. 내일일은 또 내일 생각하면 되니까. 전철까지 뛰어가지 않으면 막차를 놓친다고 태수의 등을 자꾸 떠밀었다. 등 떠밀려 몇 걸음 떼어놓다가 다시 돌아서서 나에게로 휙 다가왔다. 으스러질 것 같은 잠깐의 포옹을 남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승역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의 무릎께서 외투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찬바람이 옷을 대충 입고 나온 나의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자꾸자꾸 목도리를 여미면서, 우들우들 하면서, 그 버드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나는 오래도록 서있었다. 태수는 이제 우리 집 사윗감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온 아파트 여인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학에서도 동기들과 후배들, 심지어 선생님들 사이에도 태수가 나의 애인이라고 쉬쉬하며 공공연한 비밀로 돌아가고 있다.
내 나이 이제 갓 스물, 엄마는 태수가 처음으로 나를 따라 우리 집에 온 그날 단 칼에 도둑놈이라고 했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망울을 꺾으면 어떻게 하냐는 유식한 표현을 써가며. 두 고모와 고모부들까지 총동원되어 가족회의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떠들썩했지만 태수는 더 완강해져 갔고 어린 나는 이 고집스러운 남자에게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딸 키운 유세 하느라 겉으로 싫은 소리 탕탕하는 엄마 빼고 우리 온 집안 식구 또한 태수를 좋아했고 환영했다. 특히 할머니가.
그러나 어린 내 마음속엔 항상 찬바람이 윙윙 불고 있었고 태수가 나를 좋아하는 것 빼고 지켜야 할 의무와 해나가야 할 숙제가 산 너머 또 산이었다. 모든 것이 부옇게 불투명해서 이런 생활 자체가 진저리 쳐질 때가 많았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집으로 달리는데 아파트 귀퉁이에서 엄마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에구 추운데 입때껏 안 들어와서,”
“응 요기 버드나무까지 같이 갔었어.”
단박에 엄마와 한 덩어리가 되어 캄캄한 아파트 현관문으로 달음박질쳤다. 반달이 구름 속에서 미끄러져 나와 모녀를 따라오며 비추었다. 버드나무 긴 가지들이 솨솨 소리 내며 찬바람에 사방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2024년 8월 29일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