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2
어릴 때부터 한 해를 통 털어 헌법절인 12월 27일부터 새해 첫날까지 제일 설레고 즐거운 명절연휴였다. 인민학교 시절에는 이 연휴 때 학교단위로 한 달 전부터 설맞이공연을 준비하여 그 해의 마지막 날엔 아예 먹을 것을 잔뜩 싸가지고 학교강당에 모여 공연과 이야기모임을 즐기며 하룻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었다. 이때에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 부모님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여 누구나 출연자가 되어 춤추고 노래하고 재담을 뽐내곤 하였다. 그래서 새해전야제를 치르는 그 해의 마지막 밤은 그야말로 아이들에게는 다음 해동안 두고두고 추억하는 행복한 밤이 되곤 하였다. 고등중학교에 올라오면서 그런 설맞이행사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 날 만큼은 또래동무들과 추운 줄 모르고 동네방네 휘저으며 다니며 뛰어놀다 자정이 지나서야, 즉 새해가 시작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1988년 마지막 달은 4학년 1학기 기말고사와 함께 지겹게, 그러나 재빠르게 지나갔다. 저마다 그 학기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제각각 무겁고, 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렇지만 모두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해의 마지막 하굣길에 올랐다. 최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의 이름이 보란 듯이 대학 1층 복도의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학생정문을 통과하여 앞만 보고 걸었다.
짧은 겨울해가 구름 속에 가리어 언제 서쪽으로 넘어갔는지 모르게 사방은 벌써 부연 어둠이 빠르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이 군데군데 얼어붙은 미끄러운 도로를 뭉툭한 통굽구둣발로 살살 밀며 걸었다. 넘어질 가봐 외투주머니에 장갑 낀 채로 넣었던 왼손을 뺐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내 어깨를 건드리며 귀에 익은 특유의 맑고 쟁쟁한 목소리가 울린다. 하얀 털실머플러를 감아 더 하얘 보이는 흰 얼굴이 내 옆으로 불쑥 나타난다.
“오늘은 왜 혼자야?”
“…………”
나는 그냥 쓸쓸히 웃었다. 경숙이 내 왼 팔을 끼고
“오랜만에 지아랑 같이 가보네, 흐흐흐"
"얘, 미끄러워서 넘어져, 팔 좀 놓고 조심히 걸어 “
경숙이 더 내 옆을 파고들며, 내 옆얼굴을 힐끗 보며 쟁쟁하게 말한다.
“얘, 혜수 그 애가 이번에 우리 과 수석이던데, 그 독한 게 저번 학기부터 벼루 더니.”
“…………”
“그건 그렇고, 아, 이제부터 방학이네, 지아야, 마지막 날 있는 우리 과모임에 너 우리 집에 왔다가 나랑 같이 가, 교복 입기 싫은데 사회복 입고 가면 어때?”
“난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어, 그냥 교복 입고 갈게.”
경숙이 그 쟁쟁한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며
“그래, 그럼 나도 교복 입고 가야겠다.”
올 8월에 중국으로 유학 갔던 우리 과 남자동기생 2명이 방학 차 귀국했는데 집안형편이 넉넉한 한 동기생이 새해 전날 학과 전원을 본인의 집으로 초대했다고 하교 전 반장이 교탁 앞에서 공지했다. 그들이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외국으로 간다고 떠들썩하며 주위 학생들의 부러움을 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어 귀국했다니, 여기 남은 우리들은 그 한 학기 동안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준비에, 강의 끝나면 깃발 대 들고 다니고 , 또 여학생들은 내년에 있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공연준비랍시고 10월 한 달 내내 강의에서도 빠져 매일 대동강변에서 얼굴 까맣게 태우며 노들강변 장구춤이나 지겹게 연습하러 다녔는데. 기껏 한 달 동안 애써 춤을 배워놓았더니 소수정예의 전문예술인들로 해당 장을 꾸린다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 바로 해산해 버렸다. 우리는 얼씨구나 하며 교실로 돌아왔었다.
그 시절 나라에서는 대학교 3학년 남자 직통생학생들(군에 입대하지 않고 고등중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으로 진학한)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한 학과에서 1명~2명씩 선발하여 동유럽과 구소련, 그리고 중국에 유학을 보내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성적여하를 떠나 아예 유학대상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의 잔재가 뿌리깊이 남아있는 땅에 태어나 자랐기에 웬만한 여성차별은 원래 그러한 것으로 여기고 지내던 나는 이때부터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지독한 회한을 품기 시작했으며 이 감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내 마음속에 응어리져갔다.
널찍한 거실에 둥근 상이 3개가 펼쳐져있었고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실감 나게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매일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하루 세끼 소박한 밥은 먹고 다니는 나로서는 그런 기름지고 푸짐한 음식 앞에 앉자마자 속이 니글니글 해왔다. 역시 권세와 돈의 힘은 이러하구나, 제대군인팀, 직통생남자팀, 여학생팀 이렇게 3개의 상에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둘러앉았고 우리 여자들은 한상에 앉아서도 다들 다른 상에 앉아있는 유학생 남자동기들 얼굴 건너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까맣고 훌쭉하던 얼굴이 신세계의 훈훈한 바람과 휘황한 불빛이 묻어와 보기 좋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유학생활이나 그 나라와 도시의 환경, 그리고 외국대학의 교실문화에 대한 질문은 모두 남자들이 했고 우리 여자들은 듣기만 하며 앉아있었다. 그들은 아직 학부에 올라가지 못하고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언어학원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일 년 동안의 그 과정을 거쳐야 각자 정해주는 대학에 입학하여 정식 대학생이 된다고 한다. 가히 충격적인 말은 중국대학의 교실들에서 여학생들이 바닥에 침을 뱉거나 심심풀이로 통로 쪽으로 다리를 뻗어 지나가는 남학생들을 넘어뜨리거나 해도 선생님들이나 남자동기생들이 못 본척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와 경숙이가 입을 벌리고 눈은 맞추며 살포시 웃었다.
이날 우리 모두의 최대의 관심사는 이미 개혁개방의 길에 들어서 독특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하는 중국사회의 현황이었지만 누구도 가벼운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들이 부엌에서 밥을 짓는다는 얘기나, 시장에 지천으로 쌓여있다는 상품얘기나, 대학생들의 자유 분망한 캠퍼스생활얘기나,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외국의 세상을 보고 들은 적 없는 나나 앉아있는 모두에게는 과히 신선한 상상력을 불러왔다.
이제 남자들은 술도 거나하게 마셔 벌건 얼굴들로 수선수선하고 있다. 여자들에게 술을 권하는 남자는 없었다. 누군가가 젓가락장단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몇이 덩달아 따라 부르더니 우리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말한다.
“너희도 같이 불러봐~,”
노래가 끝날 무렵 익살꾸러기 한 친구가 마지막 노래가사를
“언제나 비행기 문고리 잡아보나~” 로 바꾸어 불렀는데 또 한 친구가
“언제나 압록강 건너가 보려나 아~” 로 맞받아치며 노래 가락 뽑아 제낀다. 나는 무표정의 얼굴로 술 마시고 노래하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앉았다. 저기 상석 쪽에 앉은 태수가 마주 보인다. 옆 사람과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술은 많이 마신듯한데 얼굴은 평화롭다.
모두 해피 뉴 이어 할 때까지 앉아있을 작정인가. 경숙의 어깨를 짚으며 일어났다. 매서운 칼바람에 아파트 현관문이 덜컹거린다. 거리에는 제법 사람이 많다. 그러나 추위에 몸을 옹송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다. 경숙이 쟁쟁한 목소리로 태수와 호들갑스럽게 얘기하며 내 뒤로 쫓아온다.
“이 새침데기,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 얘, 나 먼저 간다,” 경숙이 저만치 앞으로 한 절 반 뛰어간다.
황금벌역을 향하여 나는 태수와 묵묵히 걸었다. 새해설날이라고 가로수마다 장식해 놓은 색색의 꼬마전등들이 나무모양으로 반짝반짝 명멸하고 있다. 이따금 도로로 자동차가 찬바람을 일구며 지나간다.
지하철역 앞에서 불빛을 등지고 돌아섰다.
“새해를 축하해요”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태수는 내 왼손을 잡으며 말했다.
“ 응, 너도, 내일 오전에 데리러 갈까? 집으로 같이 오게……”
“아니요, 내가 갈게요, 오전 열 시쯤……”
지하철역사 안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감색외투주머니에 왼손을 찌르고 오른손을 들어 보이는 태수의 얼굴이 추워 보인다.
아찔하게 깊은 에스컬레이터의 반대쪽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와 엄마는 내일 내가 태수네 부모님께 설 인사 간다고 새벽부터 깨송편을 만든다고 분주할 것이다. 멍하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끝 지점에 오뚝하니 서있던 안내양이 내 팔을 잡아준다.
태수와 나는 끝까지 같이 갈 수 있을 것인가, 유년의 그 행복했던 새해전야제는 더는 없을 것인가.
2024년 9월 3일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