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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멀어도

걷고 또 걸으면

by 신관복

여기는 어디인가,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의 시간은 뿌옇다. 마치 내가 멀고 먼 길을 헤매고, 돌고 돌아서, 어딘지 모를 낯선 곳에 홀로 망연자실 누워 있는 착각에 빠져, 이 뿌연 시간과 공간을 허공으로 내민 두 손으로 허둥지둥 헤쳐야만 아, 여기는 거기가 아니구나, 멀고 먼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어슴푸레한 새벽의 시간 속에서 나는 새날을 의식하며 눈을 뜬다.

‘거기는 너무 멀고 험해서 간다고, 가노라고,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거기는 쉽게 가지는 그런 곳이 아니구나,’

방안의 어둠의 농도를 느끼며 새벽시간을 가늠했다. 6시쯤 되었으리라. 잠시 눈을 감고 간밤에 내가 거기로 가서 그를 만나고 왔는지, 아니면 그가 여기로 나를 보러 왔었는지를 생각했다, 둘 중의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가 나에게 헝겊 뭉텅이로 칭칭 동인 자기의 발을 보여주며 신발이 없다고 하기에 나는 당장 신발을 사러 가자고 했다. 둘이서 같이 무언가를 하러 간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는 헝겊 뭉텅이의 발로, 나는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하면서 같이 걸었다. 오래오래 걸었는데 신발상점이 나오지 않았고 어느 지점에서 나는 뿌연 새벽을 맞이했다. 옆에 그는 없었다.

흰 커튼너머의 창문이 희끄무레해져서 서서히 방안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끙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바로 벽면에 그가 어린 아들을 안고 나는 그의 팔을 끼고 앞을 응시하며 흑백의 모습으로 커다랗게 서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우리는 중앙동물원에 구경을 갔었지, 세 살 난 아들은 호랑이와 사자 우리를 지날 때 무서워서 눈도 돌리지 않고, 울지도 않고, 입을 옥 다물고 아장아장 앞으로만 걸었지, 그와 나는 그 애의 뒤를 따라가며 허리를 꼬부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었지, 커다랗게 웃으면 아들이 와 울음을 터뜨릴까 봐. 수양버들이 흐느적거리고 봄꽃이 예쁜, 넓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사진사가 기념사진 한 장 찍고 가라고 우리를 손짓하며 불러, 그날 우리는 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흑백사진을 남기게 되었지. 유화 하단에 중앙동물원 기념이라는 글발이 보인다. 1995년 4월의 어느 휴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의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모두 내 신발이다. 그의 신발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 시골서 짐 싸가지고 올라올 때 내 것만 가지고 왔지, 돌아서서 거실 벽면에 걸린 “平安家”쪽으로 다가가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아름다운 동산 속의 아늑한 2층집이다. 간밤에 그는 헝겊뭉텅이의 발을 끌고 나에게로 와 함께 저 평안가로 갈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발을 못 신고 나선 길이어서 발길이 더디어서인지 가도 가도 우리들의 평안가는 나오지 않았다.

커튼을 젖히고 완연히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해의 첫 아침이다. 그이가 혼자서 먼 길을 떠난 지 벌써 세 번째 새해를 맞는구나, 아마 나에게 남기고 떠난 저 그림 속의 아름다운 집을 찾으려고 서둘러 떠난 것일 수도 있겠구나.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새해의 아침공기를 가슴 가득히 마셨다. 그가 있는 거기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평안가를 찾아 신발이 닳도록 걸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이 머나먼 길을 씩씩하고 늠름하게 걸을 수 있기를 이 세상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께 기도하며 창문을 닫았다.


여보, 거기서 우리의 아름다운 평안가를 찾았나요? 그래서 신발이 닳고 닳도록 걸어서 나에게로 왔던 것인가요?



2025년 1월 1월 새해 첫날밤에 신관복 쓰다.

KakaoTalk_20230403_121235480_02.jpg 중앙동물원 기념 가족사진을 유화로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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