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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일기(12): 기억에 남는 판사님 이야기 (1)

by 장파덕

법무관 시절, 군부대가 민간인 소유 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이유로 토지주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변론기일에 출석한 적이 있었다. 원고 측에서는 군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땅을 점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진자료를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향후 입증취지를 밝혔다. 땅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참호가 있고 저기에 뭐가 있고... 이런 자료들을 말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사진으로 제출하고 이후 감정을 통해 구체적인 무단점유 면적을 밝히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대뜸 판사님께서 '최근에 북괴가 법원 전산망을 해킹했어요. 이거 그냥 제출해도 될까요? 피고 소송수행자, 괜찮겠어요?'라고 말했다.


판사님 말씀의 취지는 이해가 되었다. 북한이 법원 전산망을 해킹해서 여러 자료들이 누출된 게 최근 일인 만큼, 군사적인 내용의 자료가 혹여나 일반적인 전자소송 시스템을 통해서 제출되고 해킹이 일어날 경우 국가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다행히도, 내가 '어버버'하는 사이에, 원고 대리인 측에서 해당 부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 이른바 '영외'이고, 바로 옆 고속도로에서 육안으로 쉽게 관찰이 될 만큼 공개된 부지라서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설명하였고, 판사님도 그렇게 공개된 정보라면 전자소송 사이트를 통한 증거 제출에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셔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법무관으로 재판을 나가다 보면 대부분 판사님은 법무관들에게 온정적인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법조계 후배이기도 하고, 많은 남성 법조인들은 법무관 출신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마 혹시나 군사정보가 누설되었을 때 불이익을 우려하신 차원에서 하신 말씀 같았다. 약간은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북한'이 아니라 '북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게 조금은 의아하고,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역사적으로야 북한 정권이 소련의 후원을 받아서 성립된 것이 맞으니, '북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기는 한데.. 지금 북한 정권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괴뢰'라고 불리기에는 독자적인 외교를 하고 있어서 조금 잘못된 표현이긴 하다.


무엇보다도, 북한을 우리나라와 대등한 당사자로 보지 않는 표현, 어떻게 보면 멸칭이라는 점에서 더 문제가 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헌법상 북한은 이중적 지위를 갖고 있다. 헌법상 영토조항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영토를 불법 점거하는 반국가단체에 해당하고, 헌법상 평화통일조항에 의하면 평화통일을 위해 교류하고 협력해야 할 대상에 해당한다. 특히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우리는 국제적으로도 더 이상 북한을 '괴뢰'로 취급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의 어느 나라도 북한을 괴뢰국이나 군벌집단 따위의 국가를 참칭하는 단체로 보지 않는다. 여러 모로 '북괴'는 시대착오적 단어이다.


오히려 '북괴'라는 단어는 북한을 평화통일의 대상이나 교류협력의 대상이 아닌 말살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조금은 부적절한 측면이 강한 단어라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이 우리와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괴뢰에 불과하다면, 일종의 군벌집단이나 반국가단체에 불과하다면 북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적대시'에 불과하다. 물론 북한 정권의 반인권,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는 규탄의 대상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의 서희가 거란군과 외교 담판에 나선 것처럼, 적대 세력과도 외교는 해야 하고, 협상은 해야 한다. 교류협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과도 협력해야 한다.


북한 정권은 밉다. 그러나 2000만 북한 인민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장기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과도 최소한의 교류와 협력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군사적으로는 북한이 반국가단체, 주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외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는 북한은 협상의 대상이고 협력의 대상이다. '북괴'라는 표현은 이러한 북한의 이중적인 지위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중립적이지 못하다. (물론 '북한'이라는 표현조차도 공식 국호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립적이지 못하기는 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북한'이라는 통용되는 표현을 놔두고 굳이 '북괴'라는 표현을?


판사도 공무원이고,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진다.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한 법질서 전체를 지켜야 할 책임을 진다. 판사라면 그러한 의무를 더 엄중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특히 법정에서 재판을 주재하는 입장에서라면 판사는 그 표현을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아마도 그 판사님께서는 자신의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약간은 장난조로, 분위기를 풀려는 의미에서 '북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걸지도 모른다. 판사님께서 대단히 정치적으로 편향된 입장에서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북괴'라는 표현이 현행 헌법상 북한의 이중적 지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백 보 양보하여 전장에 선 군인이라면 '북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인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북한은 엄연히 군사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적(빨간색)'이다. 그러나 군의 역할과 민간의 역할은 달라야 한다. 국가는 북한을 군사적 적대세력인 동시에 외교적, 문화적, 사회적인 교류협력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때 말하는 '국가'에는 행정부를 비롯하여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포함됨은 물론이다. 사법부 역시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나 평화통일과 관련하여 전혀 무관한 부서가 아니다. 북한과의 교류협력이 이루어진다면 북한의 개인, 법인과의 민사, 상사관계를 어떻게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한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 현지법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고, 어디까지 국내법을 적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법부의 일원이 '북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남북 교류협력과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의문이 든다. 당연히 그 판사님께서 특별한 의도를 갖고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한 명의 시민으로서 노파심에 쓸 데 없는 말을 덧붙여 본다. 북한과의 교류협력이 끊어지고 지지부진한 요즘이지만, 그럴수록 북한을 막연히 적대시하기보다는 북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족: 해당 사건은 내가 전역할 때까지 2년이 넘도록 1심 선고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해당 부지를 점유한 군부대 관계자들이 측량 등에 협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국가가 민간인 토지를 무단점유하고 있다는 게 명확하다면, 조속히 권리관계를 정리하고 대민물의를 해소하는 게 군인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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