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고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포스트모던 먹물들의 지적 허영심 가득한 책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어쩌면 보르헤스나 '포스트모던 먹물들'과는 정반대의 사상적 기반에서 태어난 책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김동식 씨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그저 취미로 틈틈이 인터넷에 글을 쓰던 분이였다. 먹물도 아니고 포스트모던도 아니라는 점에서 대단히 마음에 든다. 적어도 보르헤스의 <픽션들>보다는 훨씬 더 이해 가능한 책이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을 순 있으니까.
읽기 쉽게 쓰였다고 해서 그 메시지나 전하고자 하는 바,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질문의 수준이 낮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기발한 하나의 착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가는 솜씨는 훌륭하다. 다만, 아무래도 특정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개별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나, 전반적인 이야기의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다. 소재는 참신하고 메시지는 좋지만, 소설을 풍성하게 해 주는 전반적인 서사의 깊이가 깊지는 않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회색인간>은 김동식 작가가 제조업 노동자로 살면서 취미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들을 모은 소설집이다보니, 앞으로 더욱 서사의 깊이는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약 20개 정도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들은 각기 다른 사건과 각기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읽기 쉬운 글이라서 어쩌면 앉은 자리에서 20개의 이야기를 다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아무래도 표제작인 <회색 인간>도 있겠지만, <피노키오의 꿈>을 꼽고 싶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어느 노인이 만든 목각인형이 신의 힘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신을 만나고, 신은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하는데, 그 목각인형은 '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소원 대신에 '저는 건강한 소나무가 되고 싶어요!'라는 소원을 빌고, 소나무가 된다.
피노키오는 정말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피노키오가 사람과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 근본은 나무토막일 뿐이다. 사람들은 화성의 크레이터에서도 예수 얼굴을 찾아내고, 바위의 모양을 보고 '용바위', '촛대바위'와 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돌일 뿐이다. 노인이 애정을 담아 사람의 형상으로 깎아내고 붙이고 조립했겠지만 그 역시 사람의 관점일 뿐, 근본적으로는 나무토막의 모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피노키오에게 자아가 있다면 다시 원래대로 건강한 나무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만 하지,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어려운데, 하물며 다른 종(種)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우랴. 우리는 너무나도 인간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지구의 주인은 인류가 아니고 우리는 수많은 다른 생명종들과 함께 이 지구를 나누어 쓰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으로, 인간이 어떤 물체에 부여한 의미와 그 물체의 본질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에서 누군가는 그저 소변기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새하얀 도자기의 아름다운 곡선을 상상하고 그 도자기를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딜도를 보고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의 도구'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싸움박질할 때 딱 쓰기 좋은 청동 몽둥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지폐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돈'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폐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일 뿐, 근본적으로 지폐란 종이쪼가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사실은 종이가 아니라 무슨 섬유로 만든 것이라고는 한다). 사람들은 지폐에 엄청난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지폐를 그러한 가치로 보지 않고 종이접기를 하거나 심지어 휴지마냥 똥을 닦는 데 쓴다면 놀라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폐의 본질은 '가치'인가 '종이'인가? 어쩌면 지폐의 본질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현금이 지폐 대신 동전만 있다면 금융거래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반대로 지폐도 동전도 없고 전자화폐만 있다면, 우리 사회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사람들은 피노키오를 '사람을 닮은 목각인형'으로 보지만, 그 본질은 '나무토막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의 의미에만 집착해, 어떤 물체에 다른 본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간과하곤 한다. 누군가에겐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이자 어쩌고저쩌고 엄청난 작위를 가진 귀족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한낱 죄 많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파란색'이라고 쓰인 글자가 빨간색으로 쓰인 걸 보면 이것은 파란색인가 빨간색인가. 어느 종이에 국가가 '10000원'이라는 글씨를 인쇄하면 그것은 돈인가 종이인가. 어느 노인이 나무를 베어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내면 그것은 피노키오인가 나무토막인가. 어느 건물 남자화장실에 있는 소변기는 더러운 소변기인가 아름다운 <샘>인가. 김동식의 단편소설 <피노키오의 꿈>에서는 그 물체가 자아를 갖고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거부하고 본질을 스스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피노키오가 신의 은총으로 생명을 갖고 스스로의 본질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미'와 '본질'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와 '본질'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는 데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이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 피노키오를 목각인형이 아니라 나무토막으로 보는 것처럼, 스마트폰을 통신기기가 아니라 '검은 화면'으로 보는 게 때로는 도움이 된다(<블랙 미러>라는 드라마처럼).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로부터 벗어나 어떤 물체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그 물체를 낯선 시선에서 한 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지폐를 종이접기 소재로 쓰거나, 무언가를 닦는 데 쓰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의미'와 다른 '본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김동식 작가는 이러한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어디까지 낯설어질 수 있을까? 김동식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