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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19. 2021

자선 자본주의의 두 얼굴에 대해

『빌 게이츠,기후재앙을 피하는 법』↔『빌 게이츠는 왜 아프리카에 갔을까』

  '자선 자본주의'라는 어구는 왠지 모르게 묘한 감각을 선사한다. 특질이 서로 다른 '자선(philanthropy)'과 '자본주의(capitalism)'의 조합(philantrocapitalism)에서 나오는 위화감이 누군가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타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자와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가 가장 먼저 연상되는 후자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선 자본주의는 이미 세상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사업을 추진하거나 막대한 기금을 기부하는 등의 방식으로 세계 각지에 뛰어들고, 그렇게 확보한 영향력으로 다시 부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자선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이타적인 의도에서 시작되어 이타적인 결과로 끝나야 할 것 같은 자선이 자본주의와 결합해 목적이 변질된 것이기에, 많은 이들은 자선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은 의미로 사용하진 않는다. 대의를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는 거부(巨富)들의 모습을 비아냥거릴 때에 자주 쓰이곤 한다.


  물론 큰돈을 투자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는 부호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뉘앙스에 대해 적극 항변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출발을 했는지 그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척이나 어렵고 민감한 이슈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부들의 지출에 자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비판하는 이들과, 자선이라는 딱지를 붙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모두 들어볼 필요가 있다. 『빌 게이츠는 왜 아프리카에 갔을까』(리오넬 아스트뤽 著)와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빌 게이츠 著)을 통해 양측의 대립 양상을 살펴보자.




게이츠 재단의 세계 보건 기부 중 액수로 상위를 차지하는 항목으로는 아동 등의 백신 접종 확대를 위해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 기부한 15억 달러, '패스 말라리아 백신 이니셔티브'에 4억 5600만 달러 … 등이 있다.
(『빌 게이츠는 왜 아프리카에 갔을까』, 소소의 책, p.197)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내용은 세계를 대표하는 부호들이 막대한 자금을 세계 각지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투자하는 많은 영역 중 백신만 놓고 봐도 25억 달러 이상을 투입했다. 수천 년 전부터 인류와 전쟁을 치러 온 말라리아의 퇴치를 위해 그는 백신 개발과 R&D에 꾸준히 자금을 지원해 왔으며, 이밖에도 홍역이나 소아마비 등의 위험한 병들에 대한 백신 개발에 나선 연구 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반복적인 실험 및 재료 조달 등 거금이 필요한 제약 분야의 특성상, 자금을 지원해 줄 조력자가 없으면 프로젝트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빌 게이츠가 내민 손길이 없었다면 사업 추진을 하기 어려웠을 단체들도 많았을 것이며, 그의 자금 지원으로 성공한 사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투자한 거금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활수준 향상이 이루어진 것에도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개도국에서 빌 게이츠에게 기대하는 건 위생 시설을 마련해 주는 것도, 현지 상황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자신들의 우선 과제를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재단이 막대한 기금을 출연한다는 이유로 이러이러한 정책을 명령해서야 되겠는가?
(위의 책, p.110)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곳에 힘이 붙어 간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빌 게이츠는 자금 문제로 곤란해하고 있는 연구 단체부터 개발도상국의 보건 위생 관련 사업 등 광범위한 영역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업가의 판단에 의한 행동이므로, 결국 어디선가는 대의명분보다 돈의 논리에 좌우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오늘날 디프테리아, 백일해, 말라리아 등 각종 전염병으로부터 가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열대 지방에 있는 가난한 개도국 주민들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으면 치명적인 전염병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매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약과 치료제보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선진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이 우선 개발되어 수요와 공급이 미스매치되는 경우가 있다. 말라리아와 홍역 백신이 절실한 남아시아와 아프리카권의 시민들에게, 서구권에서 완전한 근절을 위해 만들어진 소아마비 백신이 먼저 도달하는 난처한 상황이 대표적이다(위의 책, p.110).


또한, 빌 게이츠는 많은 단체에 대대적인 자금 지원을 해주는 대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도록 하고 있다. 지원을 받은 단체는 자신들의 우선순위가 아닌 그가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따라서, 그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방식에 따라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빌 게이츠가 대의명분을 이윤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자금력을 쥔 개인이 여러 단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기업가의 거대한 발걸음에 의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자선가를 가장한 위선적인 사업가', 또는 그것을 넘어 '1인 1표 민주 사회의 잠재적 위협'이라고 부른다. 이런 날선 비판에 시대의 거인은 어떤 식으로 항변할까.




… 나는 최고의 과학자들과 기업가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획기적 에너지 연합 등과 일을 하면서, 나는 발전 과정에서 (탄소) 제로를 달성하는 데 혁명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잠재적 돌파구에 대해 배웠다. …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미친 아이디어에 투자하기를 꺼려서는 안 된다. 미친 아이디어에도 투자를 해야 최소 한두 개 정도의 기막힌 혁신을 얻을 수 있다.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김영사, p.122)


  공학자이자 기업가로서 빌 게이츠가 가진 강점은 세계의 기술적 수요를 파악하고 그것의 경제성을 분석해 사업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능력일 것이다. 특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문제에서 경제성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기업들이 감내해야 하는 추가 비용 부담이 높은 상태에서 시스템 차원의 변화는 불가능하다(위의 책, p.155). 어찌 됐든 그는 근본적으로 사업가이며, 사업가라면 무릇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법적인 틀 안에서 이윤 추구는 당연한 것인데, 빌 게이츠는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사업에도 거금을 투입해 보건·의료·통신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감당할 수 없는 곳에 손을 내미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가난한 농부들이 생산량을 높이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이들은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수백만 사람들은 필요한 음식과 영양소를 얻게 될 것이다.
(위의 책, p.176)

    

  세계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는 사업가들을 누군가는 '자선가를 가장한 위선적인 사업가'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표면상의 목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행위자에게 위선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 옳지만은 않을 것이다.


  각국의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예산선 안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만큼 모든 사업을 전폭적으로 밀어줄 수 없다.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정부 지원에서 후순위로 밀려났을 때, 소외된 이들의 곤란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손길이 필요하다.

 부유한 사업가들은 이 상황에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자금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힘이 절박한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면, 그들이 향후 얻게 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한 것이 정말로 더 큰 이윤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내세운 가치가 실현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때때로 노벨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가들의 행보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관점과 호의적인 시선 사이에는 이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대의에 비롯한 자선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다소 불순한 의도가 섞인 투자라고 보는가에 따라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극명하게 나뉜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 따라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 서든, 현대 사회에 닥쳐온 거대한 담론을 외면할 수는 없다.



가진 돈을 어떻게 쓰든 그들의 자유이다. 부자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더 살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있는가?


돈이 많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굴러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돈 쓰는 것이 자유라 해도 갖은 방법으로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의 흐름을 유도하는 것은 월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근본적으로 (주로 경제적)자유의 크기, 영향력의 크기를 의미한다. 세계의 대부호들은 다른 이들보다 재화에 대해 월등히 큰 접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일부를 바꾸어 놓을 힘까지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그들이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부유한 영웅'이 될 수도 있으며 '모두를 돈으로 포섭하는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다.


  영웅도 지배자도 될 수도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빌 게이츠의 양면을 비추는 두 서적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거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부여한다. 아스트뤽과 빌 게이츠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 난제에 대해 자신만의 대답을 떠올려 보는 것은, 여러분이 공허하게 느낄지도 모를 여유 시간을 어느 정도 채워줄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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