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내던진 공무원, 취업 준비에 뛰어들다

모험을 감행한 청년의 고군분투 생존기

by 노루
팀장님, 저 일 그만두려 합니다.

이 말을 꺼냈던 곳은 출장을 위해 타고 나갔던 관용차 안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로 운을 뗐을 때 팀장님께선 불안에 찬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계셨다. 무슨 일이 있으면 용건부터 말하는 필자의 습관에서 벗어난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범상치 않은 말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마음을 먹고 꺼낸 말이었다. 좋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필자는 상당히 넓은 업무 범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 업무를 다른 팀원들이 분담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자진해서 희생하려 할 리 없었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팀장님께 그 상황이 달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팀장님께 들은 말씀의 온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네가 그만둘 마음을 굳힐 정도라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겠지.
뭘 할진 모르겠지만 네 뜻을 존중하고 싶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인수인계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수인계나 잘하고 나가라는 차가운 대답이 들어왔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필자는 이 말을 꺼내기 석 달 전부터 퇴직하기로 결단해, 틈틈이 인수인계서를 써놓고 파일 정리를 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팀장님께선 관용차 안에서 벌어진 짧은 대화를 거의 한 달 동안 비밀에 부치셨다. 퇴직 2주 전에야 상반기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필자가 사직서를 제출해 인사 발령 이후에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 공개됐다.


인수인계를 진행하면서 마감할 수 있는 업무는 최대한 마감하기 위해 애썼다. 평일 낮에는 업무를 그대로 진행하고, 밤과 주말에는 팀원들에게 각각 인수인계를 해주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보름이 흘러 필자의 면직 공지가 올라왔고, 그다음 날을 끝으로 소위 '철밥통' 생활이 막을 내렸다.



일을 그만두자, 정말로 가까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나뉘어 보였다. 일하던 중에 꾸준히 교류했던 이들은 대부분 '드디어 그만뒀구나!'하며 탈출을 축하해줬다.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대체로 '나가서 뭘 하려고?'라며 앞날을 걱정해 줬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근황에 관심을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공직을 그만두게 됐지만 2년 남짓한 시간이 그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을 응대하며 대인 서비스에 아주 재능이 없진 않다는 것을 알았다. 창구 업무와 현장 업무를 병행하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에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좋게 생각하면 새로운 자신의 면면을 찾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기였다. 고강도 업무를 소화하면서 일을 해낼 것이라는 책임감과 자신감이 붙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 자신감이 면직하더라도 어떻게든 일하며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변한 것이 아이러니였을 뿐이다.


공부가 일보다 힘들 리가 없다!

필자는 데이터 직군 취업을 희망하고 있었다. 전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흥미가 있는 분야일 뿐 아니라, 데이터를 다루는 능력은 활용도가 무척 높기에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퇴직 후 공부를 새로 시작했을 때 9 to 9 업무 루틴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루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자유롭게 공부하며 탐구 성향이 강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루틴은 밀도 있는 일상을 만들어줬다. 오랜만에 열의를 갖고 많은 것을 동시에 배운 덕에 퇴직한 지 반년 만에 자격증 4개를 손에 넣었다. 공직 시절보다도 엑셀을 잘 쓸 수 있게 됐으며, 그땐 존재조차 몰랐던 SQL과 태블로, Power BI 등 다양한 툴을 익혔다.


취업 지원 특강을 수강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도 큰 수확이었다. 프로젝트에서 같이 고통받으며 우애를 다진 멤버를 잃고 싶지 않아 소모임까지 만들었다. 스킬과 인맥, 배경지식 모두 쭉쭉 커간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취업은 예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필자는 태어난 뒤 한 번도 경기가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 입학 이후 고용시장이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를 매해 들었다. 다만 부정적인 뉴스에 너무 익숙해져 시장의 온도를 정확히 몰랐을 뿐이었다.


지난해 여름, 필자는 채용 공고가 서울(그중에서도 강남)에 집중 것을 보고 일자리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상경하는 결단을 내렸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결의만 갖고 여윳돈도 얼마 없는 채로 이사를 했다.


당당하게 일을 그만두고 호기롭게 서울로 왔지만, 정해진 것은 월세와 고정 지출밖에 없었다.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돈은 빠듯했던 여유 자금을 금세 고갈시켰다. 급히 아르바이트에 지원했지만, 그마저도 받아주는 곳이 좀체 없었다. 통장 잔액은 펀치 한 번에 바로 게임오버될 법한 격투 게임 캐릭터를 보는 듯 위태로웠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여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은 있다

계약직과 아르바이트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두 곳씩 지원을 한 끝에, 마침내 필자를 고용해 주겠다는 곳을 찾았다. 기묘하게도 그곳은 가장 거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미루고 미루다 맨 마지막에 지원한 곳이었다.


계약직 일이었지만 그 회사에 들어간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단순히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생겼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이터 유관 분야인 AI와 관련이 있는 작업을 유능하고 유쾌한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AI 회사에서 약 3개월을 일한 뒤 다시 무직 신세가 됐다. 그러나 벼랑 끝도 겪어보고 그곳을 벗어나는 경험도 해본 뇌는 더 이상 과도한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선택한 길 위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거둘 것이고,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로 자신을 무장했다.



지난해 12월은 공무원 일을 그만둔 지 어언 500일이 다 됐던 시점이었다. 정규직과 계약직, 인턴 자리를 가리는 사치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최소 회사 1곳을 지원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사람이 칼에 여러 차례 베여 봤어도 베일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매일 거절을 당한다고 해도 고통에 아예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취준 장수생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기 전에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매번 새롭게 다져야 했다.


기회는 늘 소중한 것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50곳 넘는 회사에 지원한 끝에 필자는 면접 기회를 받았다. 한 곳은 원하던 데이터 분석 직렬이었지만 계약직 자리였다. 다른 곳은 전략/기획 직렬이었지만 정규직 자리였다.


처음엔 정규직인 후자에 더 이끌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황에선 그마저도 사치스러운 바람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이내 받아들였다. 일단 현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라도 확보해야 했다. 필자는 일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에 감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면접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루틴을 잠시 멈췄다. 일상을 바꾸자, 하루가 갑자기 길게 느껴졌다.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뇌며 길어진 하루를 채워갔다.


면접일과 함께 연말이 다가오자, 채용 공고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번 면접을 넘어서지 못하면 더 불리한 전황 속에서 싸워야 할 듯한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엄습했다. 좋게 말하면 희망적인 태도, 나쁘게 말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채 2025년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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