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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Aug 03. 2021

진정 지구를 위한 길은 무엇인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기후 논의의 판을 뒤집다


출처 : pixabay(키워드 'global warming')

  21세기 초 한반도는 20세기 초보다 평균 기온이 1.6도 높다. 세계 뉴스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는 헤드라인을 보는 것이 익숙하다. 그리고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로 인해 고통받는 여러 생물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뉴스가 끝난 뒤 자선단체 광고에 나오는 불쌍한 북극곰의 모습이 우리들의 양심을 찌른다.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장 매년 7-8월이 되면 '작년보다 더 덥다'라는 표현을 듣지 않는가. 특히 세계 평균보다 빨리 더워지고 있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가 저술한 『2050 거주불능 지구』가 발간되어 사람들의 위기감을 다시금 자극했고, '이대로 가면 안 된다'라는 공감대의 형성으로 레이첼 카슨의  환경 분야 고전 『침묵의 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절박함과 위기의식이 팽배한 세계 환경 이슈에 뛰어든 마이클 셸런버거가 과감히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세계가 파멸의 궤도 위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이들의 손길로 인해 세상이 잘못된 길로 안내받고 있다고 말한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통해, 그는 왜 자신이 공론장에서 다수의 목소리에 대항하고 있는지를 전달하고 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국가에서 탄소 배출량이 1970년대에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석탄에서 천연가스와 원자력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룬 덕분이다. … 많은 기후 활동가들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기술의 힘으로 우리는 기후 변화를 막아내고 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부키, p. 79)


  문명이 발전을 거듭하며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꾸준히 향상되어 왔고, 그 결과로 우리는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삶',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삶'에 대한 열망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넓은 폭의 정보를 둘러보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더 다양한 것을 더 많이 바라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수요를 맞추려면 공장이 더 빠르게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자원이 소모되어야 한다. 발달한 문명을 지지하고 불어난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던 시기에 석탄의 힘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던 세계 경제는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커져 버렸다.


  더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갈망하던 인간의 눈에 우라늄(원자력)이 들어왔다. 동일한 무게의 석탄보다 무려 2만 배나 높은 에너지 창출 역량을 가진 우라늄은 폭발적인 에너지 공급원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석탄이나 석유처럼 에너지 생산 과정에서 유해 물질을 배출하는 것도 아니었다. 탈공업화까지 진행될 정도로 고도화한 산업 사회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설치 비용은 굉장히 크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공해 억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산업화로 급격히 환경이 오염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산업 발전 수준을 19~20세기에서 정지시켰다면 생활수준의 향상과 환경 보호라는 두 가지 목표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산업 사회로 진입한 사람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예전의 기술 수준으로는 당대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산업과 기술이 기후 위기를 불러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상황의 개선을 위해서는 더 나은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우선순위가 다르다. 상하수도, 홍수, 에너지 관리 기반 시설을 갖추는 일이 플라스틱 쓰레기 수거 처리보다 훨씬 높은 순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 현대식 에너지 시스템의 부재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멸종 위기종 모두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위험 요인 중 하나다.
(위의 책, p.149)
바이오 연료는 에너지 효율이 낮다. 그래서 생산 과정에서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 … 콩에서 추출하는 바이오 연료가 그중 가장 효율성이 높지만 이 경우에도 석유보다 450~750배 많은 땅이 필요하다.
(위의 책, p.388)


  친환경 에너지는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며 에너지 생산 과정에서 유해 물질을 배출하지 않지만, 원료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에너지 효율이 좋지 않고 생산량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 오늘날 세계의 엄청난 전력 수요를 고려하면 공급의 불안정성은 치명적인 약점이고, 낮은 에너지 효율을 만회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원과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 역시 부담스럽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더욱 커질 문명의 규모를 홀로 지탱하기는 버겁다는 것이다.


   세계는 '탄소 중립', '친환경 산업'을 표방하며 친환경 에너지 산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80억에 달하는 인구의 에너지 수요를 친환경 에너지로 지지하겠다는 이상적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다. 결국 깨끗한 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화력 발전소를 대체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며,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에 힘을 쏟더라도 원자력 발전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환경 운동가라면 원자력이 위험하다는 거부감을 깨고, 그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을 위해서 어떤 고정관념을 어떻게 깨뜨려야 하는지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 글쓴이가 생각하는 저자의 가장 훌륭한 통찰력이다. 가난한 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벌목을 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굴뚝에서 매캐한 연기를 배출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들이 천연가스와 전기를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살림이 넉넉해져야 한다. 친환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력이 있어야 하며, 그 여력은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친환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직관에 반하는 산업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셈이다.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신의 자리를 자연으로 대체했을 뿐인 일종의 유대교-기독교 계열 종교다. … 게다가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과학과 이성적 담론에 친숙한 이들에게도 안도감을 준다. 기성 종교와 달리 미신과 환상에 기대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위의 책, p.521, 522)
넵스태드는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가 최근 발표한 아마존에 대한 보고서의 주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마존이 지구 전체 산소의 주요 공급원이라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 "그 말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어요. 아마존이 생산하는 산소가 엄청나게 많은 건 맞지만 호흡하는 과정에서 산소를 빨아들이니까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책, p.87)


  어쩌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과학적인 현실 검증 및 경제적 솔루션에는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해답은 '우리는 감정에 약하다'가 될 것이다. 지식-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며 사방팔방에서 정보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현대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 객관적이지만 복잡한 과학적 설명 대신 주관적이지만 직관적인 감성적 캐치프레이즈에 훨씬 잘 이끌린다.


  이러한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득을 벌어들일 수 있는 언론과 이해관계자들은 세상에 널리 위기의식을 전파함으로써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거부감을 퍼뜨리면 그 빈자리를 채우러 들어갈 천연가스, 화석연료 관련 업계는 쉽게 이윤을 불릴 수 있다. 그리고 기자들은 과학 보고서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편집해 위기의식을 심음으로써 효과적으로 클릭을 유도할 수 있고, '참기자'라는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 언론과 산업계가 유착하면 저자가 말하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에는 많은 신도가 생겨날 것 아니겠는가.


  성서가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음에도 종교가  수많은 신도를 거느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이 사람들의 불안을 해소해 주는 것뿐 아니라 중요하지만 알기 어려운 것(혹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화학식과 방정식은 세상이 어떠한 원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주지만, 우리는 그것을 애써서 탐구하고 파악하기보다 종교가 내미는 단순 명료한 설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지구 환경을 위할 마음이 있다면, 그리 내키지 않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과학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야 한다. 때로 과학은 반직관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경제학적인 논리와 결합하면 그 반직관성은 더욱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적인 눈으로 볼 때 맞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한다.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친환경이 중시되는 시대에 환경주의에 대한 반대 의견을 무려 550페이지에 걸쳐 피력한 데에는, 과학적 근거와 현실 세계의 진짜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사례를 인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에 드리운 두터운 위기의식과, 그러한 분위기를 고조하기 위해 편집된 근거들로 이미 영향을 받아 어그러진 인식을 논파하기 위해서 반복적인 설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글쓴이 역시 언론과 시장이 제시하는 '친환경의 길'에만 경도되어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 운동가들이 제시하는 대의명분이 그릇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빠르게 팽창하는 개도국의 공업화로 인해 대도시에서만 연간 몇십만 명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린란드에서 하루에만 빙하가 85억 톤이 녹고 브라질에서 이례적으로 눈이 내리는 등 지구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갈수록 기상 이변은 더 자주 관측되고 있고, 그 파괴력 역시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환경 보호 패러다임을 전환하여 장기적으로 지구에 득이 되는 것이 어떤 길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기술과 경제 발전에 반대하면 개도국들의 수많은 빈민들은 낮은 생활수준을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대기에 막대한 데미지를 주는 나무 및 석탄 연료 경제로부터 탈각할 수가 없다. 많은 개도국에서 가파른 인구 성장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들의 에너지원을 교체하지 못하는 환경 대책은 누군가에게는 생활수준의 정체를 안겨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불안정한 기후를 안겨줄 것이다.


  환경 문제에서 궁극적으로 인류 앞에 놓인 본질적 질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과학적·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대안 탐색에 관심을 기울이고 반직관적인 대안에도 찬성표를 던질 충분한 의지와 지성이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는가?"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완비를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인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낙후를 타개하기 위하여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한데 묶인 상황에서,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내려진 결정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후 문제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전 세계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인식을 새로이 형성하고 그 바탕에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감성적인 동기가 없으면 이성적인 대책을 실행할 추진력을 얻기 어렵다. 우리는 환경주의자들이 말하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으로부터 경계심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는 과학과 경제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값진 깨달음을 얻게 하고 환경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기회를 주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이 분야의 새로운 고전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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