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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Aug 15. 2021

금기의 영역, 생명의 프라이싱에 대해

외면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생명 가격표』라는 난제

  편의점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삼각김밥과 컵라면에는 1000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고, 몇 가지 반찬이 들어 있는 한 끼를 먹으려는 이들을 위해서는 4000~5000원 정도 하는 도시락이 준비되어 있다. 백화점에 놓여 있는 구찌 지갑의 가격은 루이 까또즈 지갑보다 자릿수가 하나 더 많다. 이처럼 시장에서는 다양한 상품의 스펙트럼만큼이나 가격의 폭 역시 굉장히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고, 소비자는 그 가격이 지불 의향 이내에 들어오면 그것을 구매한다.


  시장이란, 본질적으로 특정 성질을 가진 재화나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수요와 그 니즈를 맞춰주려는 생산자들의 공급이 매칭되어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온라인 영역의 개척으로 물리적 제약이 완화하자, 거래에 들어가는 수고로움이 점점 줄고 물자의 이동도 해가 다르게 효율화하고 있다. 점점 고도화하는 산업과 사회에 따라서 커스텀마이징이 디테일하게 이루어지고, 이전에는 거래되지 않았던 것에도 프라이싱 태그가 따라붙고 있다. 운행을 하지 않는 차로 카 풀을 하고, 남는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범람하는 프라이싱(pricing, 가격 책정)의 물결은 사회 모든 곳에 스며들었고, 많은 이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몸까지 침투해 왔다. 그러나 프라이싱이 금단의 영역까지 밀려들어왔음에도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늘 외면해 왔다. 보험과 손해배상을 통해 사람의 목숨에 가격이 차등적으로 책정되는 지경에 이른 지금, 차일피일 미뤄왔던 딜레마에 당당히 마주하기 위해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이 『생명 가격표』를 통해 터부에 손을 댔다.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귀중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일을 혐오스럽고 부도덕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생명에 가격표를 책정하는 일은 비용편익분석의 핵심이며, 9.11 희생자 보상 기금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생명 가격표』, 민음사, p.39)


  사람들이 워낙 자주 접하는 주제라서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겠지만, 사실 보험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저자의 말대로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이다. 생명보험에 월 10만 원을 내고 사망 보험금 1억 원을 받을 수 있는 계약을 해 두었다면, 그것은 보험을 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에 1억 원의 가격표를 달아놓는 것에 합의를 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흔히 보험에 가입할 때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잠재적인 손실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계약 자체가 그토록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생명에 스스로 값을 매기는 것이다.


  각종 사고와 관련해 피해 보상을 지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에서 피해자의 유족에 보상금을 책정하는 것은 목숨과 값어치를 결부한 것이다. 다소 민감한 주제이지만 최근에 발생한 백신 접종 관련 사망 사고에서 유가족에게 지급되는 보상금 4억여 원이 정해진 사례는, 사망자의 기대 소득과 피부양자에 생길 잠재적 재정 부담 등을 고려해 생명과 일정한 숫자 사이에 등식을 만들어 놓은 한 예시라 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이 '생명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존엄한 대상'이라고 하는 도덕 교육을 받으며 그 명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생명의 가치를 매기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아픈 사실을 말해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모두의 삶 역시 프라이싱의 영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시장의 효율성은 언젠가부터 우리가 생명에 가치를 매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제도를 만들어 유지하게 했다.

  

  시장이 만들어진 이래,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물리적 제약을 풀어헤쳐 거래비용을 크게 낮추었고 이는 문명과 경제 발전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러나 물리적 제약 해제의 이면에 확장 일로를 걸은 상품화 현상이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윤리적 준칙과 그에 상충하는 경제 원리가 공존하는 모순 속에 갇혀 버린 셈이다.



민사소송의 판결은 특정인들의 생명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매기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의 생명에는 마이너스 값을 부여한다. … 고소득자의 유가족들은 저소득자의 유가족들보다 보상금을 더 많이 받는다. 미국에서 백인 가정의 순자산 평균은 흑인 가정의 13배이며, 백인 가정의 중간 소득은 흑인 가정보다 60퍼센트나 높다.
(위의 책, p.83)
포드는 도로교통안전국에 제출할 비용편익분석을 준비했다. 포드 핀토 문서(Ford Pinto Memo)라고도 알려진 이 분석은 특히 규제 기관이 새 안전기준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위의 책, p.119)

  

  머릿속에서 상식과 행동이 이반되는 것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진실도 있다. 사법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생전 어떤 존재였는지에 따라 보상금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소중하다'라는 윤리적 마지노선의 붕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이를 보고 "사람의 가치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나"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유수의 대기업 CEO와 어느 빈민가의 가장이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놓고 보면, 그 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를 확장하면 세계에서 자산이 하위 50%에 해당하는 37억 명의 가치가 상위 1%의 부자만큼도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산이나 인종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의 훼손이며,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가치를 부당하게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나누어 놓은 분류 중 한 곳에 집어넣고 서로 다르게 대우한다. 차별 대우를 하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생명의 동등한 존엄성'을 강조하는 정치 체제에서 살아간 결과로, 우리는 이중성이 배어든 현실을 보고 있다.


인권 의식이 신장하고 윤리 교육이 발달해 왔지만, 생명에 대한 차등적 가치 부여는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보다 고상하고 정제된 방식으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판단의 준거를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으로 와도,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와 마주하게 된다. 통계는 설명의 신뢰도를 높이는 훌륭한 도구로 여겨지고 다양한 통계로 뒷받침된 주장은 합리적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그러나 데이터를 구성하는 다항식이 어떤 항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각 계수를 어떻게 조정했는지에 따라 결론은 크게 바뀔 수 있다. 판단을 내리는 이의 잣대에 따라 의도적으로 생명의 가치를 편집해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학적 도구로 편향적인 가치 판단을 합리화하려는 욕심은 반복적인 비극의 발단이 되어 왔다.



2010년에 전 세계는 33명의 칠레 광부들이 지하 2300피트 갱도에 매몰된 광산 붕괴 사고를 목도하였다. … TV와 인터넷 매체들은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공적인 구조 소식을 즉시 타전했다. … 칠레 광부 33명이 땅속에 갇혀 있던 69일 동안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수백 또는 수천 명의 광부들이 작업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에 대해 아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
(위의 책, p.237)


  비단 윤리적 준칙과 경제적 현실의 이율배반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완전히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감정적으로 얼마나 동질감을 느끼는가에 따라 우리는 대상의 존재 가치를 판단하고, 감정적인 결론을 목적에 맞게 합리화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도구를 활용하는 편협함을 보인다. 이목이 쏠리는 곳에 집중되는 안타까움은 무의식 중에 생명의 가치를 차등화하기도 한다. 


 상기한 대로 우리의 의식에서 윤리와 경제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사람마다 존재 가치가 다르게 매겨지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지만,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나쁜 영향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생명에까지 가치 부여가 이루어지며 보험금과 보상금이라는 개념이 생겨나 사망자의 유가족들에게 재정적인 안전장치가 마련되었고, 생명에 붙은 가격표는 추상적인 생명의 존엄성보다 더 강력한 범죄 억제 요인이 되었다. 생명 가격표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들인 것은 사회의 필요였고, 가격표를 시스템화한 제도들이 정착하며 다양한 경로로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북함을 그저 외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이들이 생명 보험을 필요로 하고 유가족에게 사망 보상금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갖가지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 가치 부여가 다르게 이루어지는 현상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명에 가치를 부과하려는 도전적인 시도는 그만큼 거대한 책임이 뒤따르고 있다

   모두의 생명은 유한하고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죽음의 무게 역시 다르지 않다. 이 명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생명에 가치를 매길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견해가 상이하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생명 가격표가 일상적으로 매겨지는 것은 현실이므로 우리는 생명 가치의 평가 방법을 반드시 직접 결정해야 한다.
(위의 책, p. 272)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가격을 부과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숫자로 정리하면 거래가 쉬워지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여러 모로 쉬워지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수치로 표현하고, 실제로 가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등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경제적 계량화는 이미 삶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본서에서 제시한 생명 가격표 역시 이러한 흐름 안으로 진입한 것을 나타내는 한 증표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달리 생명에 가격을 붙이는 일은 어떠한 방법을 택하든 심각한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다. 현상을 유지한다면 빈부 격차가 인간의 존재 가치 격차로 직결되는 불평등의 극치를 피할 수 없다. 반대로 모든 이의 삶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전제하면, 살인자와 자선사업가의 생명이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반직관적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의식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부적절한 프라이싱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공론장으로 나와 더 바람직한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당장 자신과 별 상관이 없다고 해서 작금의 상황을 방치한다면, 왜곡이 고착화할 프라이싱 시스템에 의해 언젠가 희생당할 대상자가 바로 우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너무 많은 것을 경제적인 관념의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자 의심을 너무 쉽게 거두었다.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드는 행위이지만, 사람들은 보험업계와 법조계 종사자들에게 프라이싱을 일임하고 그로 인한 편의만을 누리면서 생명에 가격표가 붙은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덜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가 생명 가격표에 대해 침묵해 왔던 것은, 프라이싱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들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드물어진 탓이 크다.


  물론 아무리 둔감해졌다고 해도, 생명에 붙는 가격표가 주는 무게감을 다른 태그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화나 서비스, 심지어 권리까지도 시중에서 계약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래가 가능하지만, 생명은 잉여분을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모자라면 매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장 위의 존재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이고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을 가진 인간이다. 룰을 임의적으로 넘어서는 시장은 신뢰를 잃고 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프라이싱 시스템이 개선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생명 가격표는 윤리적 원칙을 고집함으로써 힘들게 대의를 지키는 대신, 현실에서의 곤란함을 해소하기 위해 생명에 값어치를 붙이는 것으로 타협한 결과다. 역사에서 흔히 그래 왔듯 이 역시 효율성의 증대를 위해 인류가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계층 사회로의 역사적 퇴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잠시 효율성에 대한 추구는 접어두고 어떻게 하면 민주 사회에서 공정한 가치 부여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어려운 숙제라고 해서 해결을 무리하게 미룬 인간에게 역사가 안겨줄 미래는, 야만적 차별을 합리주의가 뒷받침하는 미증유의 심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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