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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01. 2021

학교 교육,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창의력을 죽이는가』가 현행 교육에 울리는 경고음

  누구에게나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후 수업 시간에 졸아본 경험이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같은 반 아이들과의 추억과 여러 아이들 앞에서 실수를 해 창피를 당한 기억이 한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할 때부터 실질적으로 의무 교육이나 다름이 없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색색의 기억이 우리의 12년을 장식하고 있다. 그 기간을 관통하는 동안, 우리는 자아를 완성해 가며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갔다.


  물론 우리에게 학교가 좋은 기억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는 학생과, 성적 유지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학생의 비율이 높아지는 고등학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글쓴이 역시 괴로움과 무기력함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교실 속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침체된 교실 분위기만으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에너지가 깎여 나간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고등학교를 떠나 6년이 지났지만, 그때 벌어지고 있었던 일들은 아직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여전히 추억과 배움, 그리고 지루함과 고통의 혼합이지만 우리는 그 무게추가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켄 로빈슨과 루 애로니카의 저서 『누가 창의력을 죽이는가』는, 많은 학생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참하여 모두의 관심을 환기한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이 실제로 느끼는 정신적 압박의 강도와 부모들이 생각하는 자녀의 스트레스 강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학생 가운데 거의 절반은 심각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알아차린 경우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누가 창의력을 죽이는가』, 21세기북스, p.111)


  현대 교육에서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배우며 실력이 늘지 않는 것에 짜증을 느끼거나, 대인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불안을 느끼거나, 성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등 루트가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해 줄 방법이 마땅치 않다. 개인 교습이 아니므로 학교 교육은 모든 아이들의 적성에 맞는 개별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교육 당국이 택할 선택지는 '사회가 원하는 인재'의 육성이라는 차선이다. 그러나 산업과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유형의 사람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획일화한 교과 구성은, 필연적으로 그 구성과 맞지 않는 성향을 가진 상당수의 학생에게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다.


  현대 학교 교육에서 가장 강조되는 과목은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smatics)이며, 학부모들도 자녀들이 취업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이 과목들을 전공으로 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숫자와 친하거나 친해질 의향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STEM 중심 교육은 수학을 어려워하는 많은 학생들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세워 예비 패배자로 만드는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국영수 위주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자조적으로 '수포자'나 '영포자' 딱지를 스스로 부여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효율성을 위해 소수의 엘리트 육성에 매몰된
교육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시간은 12년에 달한다. 주요 교과로 취급되는 과목에 흥미와 적성이 맞는 아이들은 이 기간을 엘리트로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장과 함께 공허함을 떠안게 될 수도 있다. 학생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이 다져온 궤도 위에서 질주에 박차를 가해야 할 타이밍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맞이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저자를 비롯한 교육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경험의 다양성이 매우 중요하다. 학교에서 교사가 개인의 학습 효율을 일일이 최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학교는 교육 프로그램을 다원화하고 예체능 및 정보 과목을 장려해 학생이 적성과 흥미를 찾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요컨대 학교의 역할은 좋은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길이 존재하는지 학생이라는 모험가들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그들이 스스로 길을 선택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 이런 가이드의 힘을 받으면 재능을 개발할 시간을 10년이나 더 벌 수 있다.


  흥미와 자발적 노력이 결합하여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판을 깔아놓는 것이 교육의 이상이 아닐까? 교사가 수학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국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깝게 생각하는 고등학생은 그 시간에 식물과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면 일류 플로리스트나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는 싹을 가진 아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부 학생과 학부모, 학교는 학업성취도 평가와 관련해 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로 ADHD 진단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학교생활과 학습에 대한 압박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단순히 졸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ADHD 약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책, p.335)


  교육의 효율화를 개인 단위로 밀어붙임으로써 생기는 가장 큰 비극은 바로 과열 경쟁에 따른 이상 현상이다. STEM(혹은 국영수) 과목에서 좋은 학습 효율을 보여준 학생들은 비슷한 특성을 가진 또래와 10년 이상을 경합한다. 경쟁이 노력을 자극해 학생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맞지만, 승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학생의 정신을 마멸하게 만든다. 지구 어딘가에서는 학생들이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문제집을 풀고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1분이라도 더 집중하기 위해서 각성제를 사용하고 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학업 성취도는 투입한 시간에 비례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적이 일정 수준을 넘기면 1일 평균 학습 시간을 올려도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게 된다. 50점에서 100점으로 가까워질수록 1점을 올리기 위해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의 양은 커진다. 그리고 한 번 고득점에 도달하면 퇴보는 누구에게도 좀체 용납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위 사람들의 높아지는 기대치와 성적을 최소한 유지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감 역시 1점이 올라갈 때마다 불어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사람이 불안함을 크게 느끼는 것과 같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보내는 학교에서의 시간이 경쟁으로 점철된다면,
그런 곳은 학교가 아니라 투기장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상위권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의 완충제로 본서에서 무용이 제시된 것이 독자들에게 그저 허튼 말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무용은 동급생과의 협응이 필수인 활동으로, 지속적인 움직임이 동반되므로 단조로운 공부 시간의 흐름을 전환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일 것이다. 굳이 무용이 아니더라도, 신체 동작이 가미된 활동이거나 친구들과의 접촉 시간을 늘리는 활동이라면 어떠한 형태든 좋을 것이다. 압박과 긴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면 수험생에게도 스트레스 강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


  강제 사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학교생활의 스펙트럼을 넓혀 학생들이 정신적으로 재충전을 하고 학교에서의 하루를 통해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얻었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는 루틴을 택할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1교시 정도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모두가 각자에게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활동을 찾아 시간을 보낼 것이며, 그 틈새 시간은 학생들에게 감정적 탈출구이자 학교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경쟁에 매몰되어 인간관계의 부산물과 신체·정신 건강까지 희생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가능한 한 전자와 후자를 최대한 양립시키도록 장려해야 한다.



오늘날 15세에서 24세까지의 청년인구는 12억 명을 훌쩍 넘는다. 이것은 전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런데 이들 중 7,000만 명은 실직 상태로, 이는 성인 실업률의 약 두 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들 실직자 중 상당수가 대학졸업자들이다. …취업을 희망하는 대학졸업자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요컨대 '졸업장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위의 책, p.159)


  학교가 다양화를 향해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현대 경제는 급격하게 긱 이코노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을 맺어, 목적이 이뤄지면 대가가 전달되고 접촉이 해제되는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있다. 노동 유연화를 원하는 기업과 근무 조건의 탄력성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노동 시장은 점점 유연성과 격동성을 더하고 있다.


  AI가 보편화한 미래에 일반 사무직과 기계적인 단순 노동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국영수에 특화해서 화이트칼라 직종을 노릴 메리트가 계속 줄어들 것임을 시사한다. 피 터지는 경쟁과 끝없는 스펙 강화를 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그러한 레드오션을 택할 이유가 없다. 미래 경제 여건에서 예술 혹은 기술적 감각을 살려 자신만의 수요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프리랜서와 크리에이터가 더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채로운 학교는 모두에게 득을 안겨줄 것이다. 아이들은 장차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크게 관련이 없는 공부를 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가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줄어들 것이며, 학교는 학생들이 희망하는 분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면서 몰입도가 높아져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입장에서도 시그니처를 가진 예술가와 독창적인 유튜버가 사무직 직원보다 더 큰 경제적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보탬이 된다. 아이덴티티를 살려줌으로써 개성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이 발휘하는 가치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교육의 실효성과 방법론에 대해 쉴 새 없이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변화의 적기라고 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공장이 물건을 찍어내듯 인재를 표준화/획일화한 틀에서 찍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시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향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맞아 교육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회의 의도에 맞추어진 포커스를 개개인에 대한 존중으로 옮는 것이다.





  역사가 산업 혁명을 넘은 이후로, 사회와 경제를 업그레이드한 일등 공신은 기술이었다. 그러한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각국이 고도의 기술력과 습득력을 갖춘 이공계열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다수의 선진 국가에서 정치 리더들은 선도적인 기술 발전이 자국의 경제 규모를 확장해 이른바 '파이'의 크기를 넓힐 수 있고, 점점 둔화하는 세계 경제성장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는 이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육계와 산업계도 갈수록 이공계열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학적·과학적 역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공계열 인재를 우대하려면, 교육은 이공계로 향하지 않을 학생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도전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소수의 특정 과목만을 중시하는 교육 시스템은 그 과목과 맞지 않는 다수의 학생이 소중한 10대 구간을 허비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육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능력을 발굴하여, 모두가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많은 학부모가 교육 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자녀가 그 길을 가서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는 이유로 학생의 잠재력을 싹부터 잘라버린다. 어떠한 길을 가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하는 교육 체계가 형성된다면 이 비극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이후 12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예체능, 요리, 코딩을 꾸준히 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10대에 누적한 경험은 결코 시간낭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쌓은 경험과 지식을 20대에 다시 다듬어, 온라인에서 숙련도가 낮지만 일상의 활력소를 찾아 도전하는 이들에게 맞춤 컨텐츠를 제공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안 좋게 본다고 해도 10대에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마음껏 경험을 쌓으면, 적성도 모른 채 대학교에 진학해 또다시 불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을 거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산업에 적합한 교육은 각자가 가진 강점을 최대한 살려 개인의 잠재 역량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 리더들의 기준으로 정한 '주요 교과'를 집중 교육하는 12년을 보내고 뒤늦게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발견하면 그 손실은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다.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개혁해 더 많은 학생들에게 추진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학교가 개인의 시간의 가치를 귀중히 여긴다는 새로운 의미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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