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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03. 2021

예술, 그곳에 한계와 제약은 없다

『클래식 인 더 뮤지엄』에서 새로운 세상을 조망하다

  예술. 그것은 즐길 때는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의미가 깊지만, 막상 배우고 파고들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든다. 초중고의 12년 동안 1주일에 한 번 정도 있는 음악 시간에 이론을 배우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 알게 되지만, 정작 우리는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대표곡의 타이틀조차 정확히 모른다. 마찬가지로, 마네와 고흐의 이름에 익숙하지만 우리는 부가적인 설명을 보지 않고 그들의 화풍에 대해 제대로 논하지 못한다.


  인상주의, 낭만파, 고전파, 다다이즘. 이러한 용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이 단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용은 없고 그저 제목뿐인 문서가 머릿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국어-영어-수학과 달리 배운 내용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해서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해나 암기가 될 만큼 반복적으로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 관련 용어를 모르면 교양이 부족하다는 쓴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그런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 중 특출 나게 교양이 풍부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겨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을 '배우는' 것보다 '감상하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보고 들은 것을 구조화하는 학문적 틀에 가두기에는, 예술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예술의 세계는 너무나도 넓게 느껴진다. 예술 세계의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되어 그 안을 깊숙이 모험하고 탐구하지 못하는 우리이지만, 진회숙 작가의 『클래식 인 더 뮤지엄』을 통해 드넓은 세상의 조감도를 살펴볼 수 있다.




백남준의 <완전한 피아노>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은 작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예술가를 꿈꾸게 만든다. …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종의 사기다. 백남준 자신도 예술은 사기라고 했다. 하지만 사기를 치는 데에도 철학이 있고 수준이 있는 법이다. 어느 정도 그럴듯한 의미를 내세우며 사기를 쳐야지 무턱대고 이상한 짓을 한다고 다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 인 더 뮤지엄』, 예문아카이브, p.45)


  언젠가 미술 교과서에서 마르셀 뒤샹의 <샘>이 파격적인 예술 작품의 예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비록 글쓴이가 그렇게 대단한 미적 감각이나 예술에 대한 감상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샘>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꼈을 황당함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때는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광활한지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예술인가'라는 당혹스러움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술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드는 <샘>, <4분 33초>, <완전한 피아노>로부터 누군가가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예술과 비(非)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듯한 감각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도전에 직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이 계속해서 경계선을 넘어 더 넓은 영역으로 팽창하려는 성질을 가지는 것은 필연이다.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 다채로워지고 확장될수록, 예술의 지평도 더욱 광활해진다.

  

  예술의 경계선이 탄력적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예술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예술은 모든 것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인 것은 아니다. 백남준의 발언이 다소 과격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의 한마디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시사하고 있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대상에 해석을 붙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운 것을 추구한다. 기존의 것이 이전에 비해 참신하더라도, 무언가에 익숙해짐으로써 점점 가치를 느끼는 감각이 무뎌져 간다. 영감을 얻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발성이 필요한 법이지만,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상을 재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대상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넘어서는 파격과 편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파격과 편집이 거듭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임계점을 넘어선다.


  이것이 <샘>을 위시한 작품들에 예술이라는 평가가 붙는 것을, 우리가 한 번에 수용하기 어려워한 이유가 아닐까?



…단순한 패턴의 음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에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 …형태의 본질만이 존재하는 세계. 이 세계의 작가들은 우리에게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의미 부여가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그 '무의미의 의미'가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감지되니 이는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위의 책, p.63)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원근법과 명암 그리고 단 하나의 시점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과감하게 던져버렸다. … 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원근법과 명암이라는 피난처에서 정서적 안정을 누렸는데, 그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작품을 대하니 마치 안식처에서 쫓겨나 가없는 우주공간으로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위의 책, p.92)


  예술의 기법을 지극히 단순하게 표현하면 더하기(+)와 빼기(-)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상태에서 빼기를 반복하면 형태의 본질이 엿보이는 미니멀리즘이 도출되며, 더하기를 반복하면 2D에서도 3D가 연상되는 입체주의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드넓은 스펙트럼을, 더하기와 빼기가 나름대로의 비율로 조합된 수많은 표현 기법이 차지하고 있다.


  덧셈 한 번과 뺄셈 한 번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부여해 대상에 예술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거듭되는 연산의 조합에는 예술가의 영감과 정체성이 실린다. 새로운 피조물에는 창작자의 정해진 의도가 녹아들어 있지만, 감상자는 복잡한 수식의 결과물만을 볼 수 있으므로 해석의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수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오롯이 창작자에게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베일에 싸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두고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창작자의 손에서 세상은 예술이 되고,
감상자의 눈과 귀에서 예술은 끝없이 퍼져나간다

  의미를 부여하고, 공유하고,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은 예술을 빚어낸다. 하지만 감각적인 피조물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논의하는 것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리고 몇십 억 개의 눈과 귀 중에서는 지배적인 공감대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관찰과 감상, 탐구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을 모두가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행히도 넓디넓은 예술의 세계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 복잡하고 다단한 의미가 교차하는 평가에서 벗어나, 감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상자를 위한 공간도 준비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 숨은 의도 따위는 없다. 작곡가의 의도나 작곡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그럴듯하게 포장된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 이런 것도 없다. 그는 그냥 음악으로 말한다. …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을 가볍다고 여기는 것은 그동안 비본질적인 것을 과도하게 짊어진 과체중의 음악에 짓눌렸기 때문이 아닐까.
(위의 책, p.170)


  위대한 음악가가 만든 선율과 역사적인 미술가의 손끝에서 나온 그림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데에는 큰 반론의 여지가 없다.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쇼팽의 녹턴과 모차르트의 발라드를 듣거나, 미켈란젤로의 벽화를 보며 '좋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한다. 이름난 아티스트의 창작물을 감상할 때, '이것은 이러한 이유로 예술이라 할 수 있다'와 같은 까다로운 사고를 거칠 필요가 없다. 


  예술의 지평이 끊임없이 넓어지면서, 의미에 의미를 덧씌우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창작가들이 남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토론장에는 의미의 홍수가 몰아닥친다. 이런 피곤한 상황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들에게 순수 예술은 오아시스와 같다.


답이 없는 문제를 제시해 모두를 고민에 빠뜨리는 작품과,
다수에게 직관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은
예술 세계에서 절묘한 대척점을 이룬다

  창작자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하는 미니멀리즘도 예술이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감상자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에 반해, 청각을 녹이는 수려한 멜로디와 시각을 만족시키는 회화는 토론장을 거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예술로서 남아 있을 수 있다. 모차르트와 바흐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해서 극찬을 받는 이유도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미(美)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와 이견이 없는 무결함에 대한 동경은 순수 예술이 언제나 자신만의 입지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비결일 것이다.



로트렉은 우리가 소위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의외로 매혹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추의 매혹, 그 저급취미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진솔한 모습이 바로 로트렉이 추구했던 세계가 아니었을까.
(위의 책, p.300)


  끝이 보이지 않는 예술의 세계란, 어찌 보면 제련과 연금술이 같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공장과 같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악기와 브러시를 거쳐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으로 변환되기도 하지만, 예술의 재료로 보기 힘든 것들이 장인들의 손놀림을 거치며 의미의 힘으로 결합해 감상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수작이 되기도 한다. 참으로 신비로운 공정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비록 물리적으로 다양한 제약에 갇힌 숙명적인 동물이지만, 이런 우리도 무한한 넓이의 추상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조금 더 용기 있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나서서 먼저 개척한 예술의 세계는, 그들과 후발 주자들의 사고 범위가 늘어나는 것과 동일한 스피드로 팽창해 간다.


  삶과 세상을 재조명하고 끊임없이 소재를 발굴해 내는 창의력,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변치 않는 이끌림.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들은 새로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열망에 스며들어 미지의 영역으로 쉼 없이 뻗어나가는 예술을 지탱할 것이다.





  예술은 여유로운 사람의 마음속에 저절로 찾아가는 방문객이 되기도 하며,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을 우연히 마주쳐 그를 달래주는 의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예술의 세계가 넓은 만큼, 예술이 취할 수 있는 형태도 무척이나 다양한 것이다. 감상자의 지식이나 경험, 추억과 감정과 결합하여 한 사람에게도 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오므로, 예술이 구성할 수 있는 의미는 사실상 무한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의 첫 문장에서 언급했듯이, 예술은 감성적으로 즐기기만 하면 좋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려 하면 난해하다. 우리는 삶의 모든 것으로부터 예술이 피어나는 가능성을 지켜보고 있지만, 입문자를 황망하게 하는 예술 세계의 방대함에 일찌감치 모험의 의욕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훌륭한 동반자인 예술을 만끽할 기회를 걷어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예술과 조금만 더 친해지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감각을 통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술과의 친분을 쌓는 과정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호기심을 가지고 한눈에 보고 납득하기 쉽지 않은 것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이겨내는 연습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지평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고 세상 모든 것에서부터 의미를 포착하는 것으로, 우리는 보다 풍요로운 삶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그 의미라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수예술로부터 느끼는 위로나 편안함 같은 것이어도 좋다. 광대한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을 위해, 예술은 모두가 함께 나누어도 부족하지 않을 소중한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다.



신만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도 세상을 창조한다. 화가는 색으로, 음악가는 소리로, 무용가는 몸짓으로, 시인은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기에 나는 예술가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위의 책, p.322)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들이 구축한 환상적인 세상이, 늘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자. 본서는 예비 방문객을 위한 근사한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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