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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Nov 25. 2021

거부감, 무관심을 넘어 들여다본 중동

『중동은 왜 싸우는가?』로 돌아보는 우리의 시선

  우리의 사고 회로에 '중동'이라는 값을 넣었을 때 먼저 도출되는 이미지는 이슬람, 석유, 사막, 내전 정도일 것이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련의 이미지(화석 연료 제외)는 대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국교 개념이 없고, 화석연료가 거의 나지 않으며,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가장 안정적인 수준의 치안을 가진 나라의 사람으로서,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중동 지역에 낯설다는 인식을 가지기 쉽다.


  중동 문화나 역사를 제대로 인식시켜 줄 매체를 찾기 어려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은 대개 중동에 무관심하다. 더구나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중동발 소식은 대개 시리아나 예멘의 참혹한 내전 양상과 난민 문제, 유가 변동과 관련한 토막글에 불과하다. 무관심에 거부감이 덧씌워지기 쉬운 여건이다. 중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은 예멘 난민 수용에 대한 격렬한 반대 여론의 사례로부터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반복적으로 유사한 자극에 노출되어 '저 사람들은 글러먹었다'라고 판단하고 본능적으로 반발감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하고 간편한 과정이기에, 우리 주위에서도 난민이나 이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격한 반응을 표출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정의 그런 간편함에 휘둘려, 왜 중동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 보는 수고로움을 생략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낯선 이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우리를 위한 안내서가 바로, 본서 『중동은 왜 싸우는가?』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이슬람권에서는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몸으로 발전해왔다. … 움마가 확대되어 만들어진 이슬람 국가의 주권은 신에게 있었다. 신의 계시를 기록해놓은 《꾸란》이 곧 헌법이나 마찬가지였다. … 문제는 무함마드 사후 더 이상 《꾸란》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알라가 한 번 계시한 말씀은 영원불변하다.
(박정욱 著 『중동은 왜 싸우는가?』, 지식프레임, p.32~33)


  한국에 국교 개념이 없고 무교인 사람이 많이 있기에, 종교가 없는 이들은 종교인들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종교는 곧 신자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나 마땅히 따라야 할 순리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종교마다 정해진 행동규범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범주에 속한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평균적인 한국인이 중동과 이슬람에 유독 강한 이질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도 이슬람교와 같이 몇십 억 명에 달하는 신자가 존재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정치나 사회 논리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서구 국가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유지한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절대자의 권위가 사회의 전 영역에 강력히 행사되는 전통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금융이 발달하고 경제가 팽창하며,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가 향상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유연하게 변화하여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의 역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알라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특유의 세계관은, 종교에 사회경제적·정치적 이념을 초월하는 막강한 통제권을 무슬림에게 이식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 이것을 목격한 무슬림들은 의문을 품었다.
"왜 신성한 이슬람 공동체가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와하비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제시했다.
"무슬림들이 알라가 계시한 올바른 이슬람의 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p.152~153)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라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사고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고방식을 지탱하는 기반과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 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차이가 왜 발생했으며, 이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슬람권에서 종교는 국가보다 먼저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해 왔다. 이슬람 국가의 근원이 종교 공동체 움마에 해당하며, 한때 스페인부터 이집트, 이란을 포괄하는 대국을 구성하는 강력한 동인을 제공한 것 역시 신앙에서 비롯한 논리였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사회의 재편과 경제 논리의 재구성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 문화와 정신세계에 녹아들었지만, 이슬람에서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겪어보지 못한 시련에 맞닥뜨린 이슬람교가 기독교처럼 자본주의와 공화정에 자신의 자리를 순순히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근대화의 영역을 개척한 유럽을 따라하다 암초에 부딪히는 자국을 보면서, 이교도들과는 다른 순수한 이슬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무슬림이 생겨난 것이다.



이슬람주의란 현대사회에 걸맞은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면 국가 구성의 원리를 이슬람의 교리와 율법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 울라마들이 종교를 담당하고 사우드 왕가가 정치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책, p.153~154)


  다른 종교에서보다 유독 이슬람교에서 근본주의가 대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가 정치 논리보다 상위의 차원에 존재하고, 사회 질서 유지를 합리화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전통에 관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세계관을 넘어 사회를 구성하고 재편하는 틀까지 장악한
쿠란의 권위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사회경제적 엘리트들이 종교의 막강한 파워를 이용할 유인이 크다.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논리를 쿠란에서 찾아 스스로 정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의 말씀을 내세워 왕가의 존재 의의와 정권의 유지를 뒷받침하고, 그러한 이론적인 배경을 공고히 할 신학자인 울라마를 부각하여 21세기에도 엄격한 이슬람주의가 적용되는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좋은 예시이다.


  쿠란의 해석에 종교적인 의도와 행동을 가미하여 국가의 통합을 이룰 단단한 체제와 논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양면성을 가진다. 내부 통합과 단속에는 효과가 크지만, 자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종교와 정치 논리가 조합된 세력과는 필연적으로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니파의 거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여러 방면에서 충돌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이곳에서 비롯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이란의 힘이 강해질 경우 …공화정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져 그 결과 사우드 왕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으로 여긴다. 한편 이란은 반미 성향의 국가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국가인데, 이 같은 외교적 차이도 양측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냉전과 갈등은 종교적 갈등이 아닌 정치적 갈등이 그 본질이다.
(위의 책, p.114)


  우리의 눈으로 봤을 때, 단편적인 소식만 접하고서는 중동에서 왜 분쟁이 끊이지 않는지 직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수니파든 시아파든 같은 무슬림인데, 왜 두 종파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해 유혈 사태가 잇따르겠는가. 그들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 전쟁을 좋아서 할 리는 없다. 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보장되지 않지만, 다른 세력과 맞붙었을 때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중동의 정세를 좁게 보면 '알라의 말씀'으로 철권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이들과 그에 반발하는 시민들 간의 알력이 보이며, 여기에 국경 없이 떠도는 쿠르드족을 둘러싼 입장 차이와 경제적 이권 쟁탈전이 얽혀 있다. 넓게 보면 종교와 정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된 사우디와 이란의 패권 쟁탈이 존재한다. 그리고 막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는 한, 중동은 전세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갈등의 스파크가 어디에서든 튀어나올 수 있는 구조다.


중동의 갖가지 난제가 발원한 곳은 주관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경전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면성이다

  이슬람교가 이와 같은 모든 문제에 엮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동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호전적이라, 혹은 이슬람교가 폭력을 무턱대고 조장하는 종교라 분쟁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중동만큼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도 드물다. 이곳에 역사적 배경이 누적된 종교적 입장 차이가 곁들어지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양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 내전에는 오늘날 중동 정치에서 나타나는 주요 정체성 갈등이 모두 등장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쟁, 쿠르드족의 독립 요구,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간 갈등, 그리고 외세의 대리전까지…. … 중동에서의 정체성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의 책, p.488~489)


  이슬람권은 종교가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한다. 그렇기에 종교가 정치나 경제와 결합되었을 때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엮이는 순간, 종교적 관점의 차이가 갈등의 기폭제이자 연료가 되기 쉽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현상을 결과론적으로만 해석하게 되어, 결과로부터 원인 및 과정을 추측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쉬워진다.


  깊지 않은 식견과 감정적인 태도가 조합되어 발현하는 관성은, 변화를 주기 힘들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기 쉽다. 특히 몰이해와 배타성이 결합되었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중동에 대한 거친 인식과 발언 역시 대개 배경에 대한 이해도보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높은 데에서 비롯한다.


  건강한 담론에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법이다. 오랜 시간 동안 앙금이 쌓이며 어쩌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척을 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진영 다툼이 사우디와 이란의 패권 쟁탈전으로 변형되어 오늘날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으로 연결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는 상당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소한 입장 혹은 의견 차이가 알력과 갈등을 만들고, 그것이 참혹한 유혈 사태로 번지는 역사적 패턴은 인류 역사가 펼쳐진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발생했다는 점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중동과 이슬람권 역시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성과 그들 나름대로의 배경을 가지는 특수성이 공존함을 염두에 두며,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무관심과 거부감, 수고로움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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