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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Mar 10. 2022

처음으로 겪은 정체성의 바통터치

'예비 공무원'인 학생에서 '예비 복학생'인 공무원으로

  공무원이 공채에 최종 합격하고 임용을 유예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2년이다. 하지만 네 학기 이상을 남겨 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터라, 결국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학력을 남기면서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면밀한 준비가 필요했음에도, 깊이 생각할 틈이 없이 갑작스럽게 시험 준비에 뛰어든 탓이었다. 공무원에 연수·유학휴직 같은 제도가 있었기에, 다행히 학력과 일자리를 모두 보존할 수 있었다.


  임용유예 기간을 거의 소진한 타이밍에 시청 인사과에 연락을 넣어, 일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보통 공무원은 정식으로 근무처에 발령이 나기 전에 일정 기간 연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연수도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현장에서 직접 배우는 것도 아니며, 기간 역시 3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막연함과 당혹스러움이 엄습했다.


3주만으로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울 수가 있는가?
그리고 실무를 배우기에 온라인 코스는 한계가 뚜렷하지 않은가?

  미래에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지 모른다는 무지로 인한 불안이 참으로 오랜만에 샘솟은 시기였다. 고민 없이 임용유예 기간을 보내왔던 터라, 정신이 불안 요소에 취약해져 있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하면서 모든 고민을 혼자 떠안고 마는 해묵은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포스트에 활용한 사진의 출처는 모두 pixabay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언택트의 편리함과 유익함을 깨달아버렸다는 말에 예외란 없었다. 첫 연수 이후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온라인 수업에 빠르게 몸이 적응해 갔다.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연수, 그리고 때때로 부여되는 과제는 대학교 생활을 해본 이라면 무척이나 익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루틴이었다. 낯익은 일상과 다시 마주하고 나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일상의 만족감을 최대화하는 방식도 생겨났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오후에 찾아올 나른함을 미리 물리치기 위해 낮잠을 자곤 했다. '예비 공무원인 대학생'이었던 시절에 고 카페인 음료를 마시면서 수면욕이 지배하는 5-6교시를 버텨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예비 복학생인 공무원'이 된 새로운 자아는 그러한 고통을 더 이상 감내하기를 거부했다.


  하루에 7시간 이상 강의를 소화하는 것이 만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자세를 장시간 유지했기에 눈과 목에 부담이 상당했고, 어려운 과제가 내려온 날이면 논문을 몇 편씩 찾아가면서 성의를 담아 분량을 채우는 것에 고심하기도 했다. 전공과는 별 관련이 없는 소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내용을 최적화하는 것에 어려움이 따랐다. 학점 부여와 같은 평가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 무렵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 같은 것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독서에 새롭게 흥미를 붙였으며, 책을 골라 읽는 동안에는 원하는 강의만 신청해서 수강하는 대학생의 만족스러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첫 출근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책장의 빈 곳은 줄어만 갔고, 그것에서 나오는 보람에 한동안 이런저런 걱정을 내려놓은 채 3주가 지나갔다.



발령 전에 상상했던 출근길의 모습과 비슷한 광경


  시청에서 임용식을 진행했을 때, 같은 타이밍에 발령이 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기 인사 기간에 맞추어 임용된 것이 아니라 임용유예 후 임의적인 시점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함께했던 인원이 적었기에, 시장님과 대면하고 덕담을 전달받는 과정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임용식이 끝나갈 무렵에 진행된 임명장 수여. 정식으로 공무원이 되어, 자신을 정의하는 우선적인 단어가 바뀌는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부모님이 그토록 바라셨던 순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의욕부터 책임감까지 수많은 감정이 얼굴 위로 뛰어올라 표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근무지를 알게 된 순간, 그러한 일련의 감정이 순식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이름만 몇 번 들어봤을 뿐 스쳐 지나가 본 적조차 없는 한적한 곳에 자신이 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청 근무를 예상하고 있었던 입장으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내심 세워두고 있었던 통근 계획, 일상에서 발생할 비용 계산이 모두 단번에 어그러지며 몇 달 분량의 불안이 단 몇 분 만에 들이닥쳤다.



발령 후 마주하게 된 출근길의 모습과 유사한 풍경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의 학교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운전 경험이 있을 리 없었으며, 자차가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하지만 교통편을 생각했을 때, 차가 없으면 출근 시간에 맞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발령지로 가시는 분의 차를 얻어 타서 첫인사 차원으로 면사무소에 가는 동안, 기대했던 일상의 전제부터 허물어지는 느낌에 하염없이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숨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같이 일할 분들은 신입이 느끼고 있을 긴장감을 알아채신 듯, 한눈에 보아도 나이가 훨씬 어린 이에게 존댓말을 써주셨다. 반말로 말씀하셔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반말을 써주셨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은 새내기는, 자신도 모르게 편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기대와 다른 일이 펼쳐진 현실에 세상이 무너진 듯 고뇌하고 있던 사람의 기분이 너무 쉽게 전환되어 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6시에 퇴근하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미 운명은 정해졌으니 출퇴근만 어떻게 잘 해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때, 면장님께서 집이 같은 방향이니 서로 대화도 더 할 겸 바래다주시겠다고 권유해 주셨다. 교통편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수석에 탑승했다.




  직급이 훨씬 높은 분과 동승해 긴장했던 탓으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명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약 30분 간 이어졌던 대화 중, 독보적으로 신입의 뇌리에 선명한 잔향을 남긴 한마디가 있었다.


대학 괜찮은 데 나오고 직장 잡은 것만으로 효도가 끝나는 게 아니지.
자네가 높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효도야.

  부모님의 바람대로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는 것을 알렸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던 말씀이었다. 이 한마디가 귀를 통과했던 때에는, 신입이 가진 혈기로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까지 노려보라는 강한 독려의 메시지로 여겨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자신이 이것을 재해석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은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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