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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Mar 16. 2022

달짝지근한, 하지만 그 이상으로 씁쓸한 나날

매너리즘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무언가

    처음으로 공무원증을 수령했을 때, 자신의 사진이 담긴 카드에 갖가지 의미 부여를 하며 귀중품을 전달받은 것 같이 속으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공무원증을 발급받아야 정식으로 공무원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사람만이 갖고 있을 만한 물건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생겼단 점에 본능적으로 만족감이 고양되었던 것이다.


  공무원증 발급 신청을 하고 나서 수령에 이르렀던 시간 동안, 신입은 존재하나 마나 하는 수준에서 사람 구실은 할 수 있는 레벨로 진화했다. 꼭 필요한 것마저 외우기 벅찼던 일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단순 반복 업무의 영역으로 하나씩 편입되었고, 전임자 분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진행이 안 되던 일들도 손에 익기 시작했다. 임용 전 생각했던 공무원의 이미지와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민원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컴퓨터에 앉아서 매일 같은 일만 기계적으로 처리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주민등록 시스템을 담당자가 누군가의 주소를 바꾸기도 하고 누군가의 생사를 확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 그 일들이 도저히 '단순한 업무'라는 말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이라는 단어 뒤에 '무거운'이라는 숨겨진 보조 수식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망신고서를 접수하는 매뉴얼은 외우기 어렵지 않았지만, 친족의 죽음을 알리러 창구 앞에 선 민원인과 대면할 때 느껴지는 숙연함은 몇 번을 경험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출생신고의 매뉴얼도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주민등록번호가 생성되고, 마침내 새로운 구성원이 세대에 추가되는 것을 볼 때 밀려오는 신기함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이런 감정들은 하나하나 쌓여가면서 일의 의미가 되어 주었다.


  공무가 창의력이나 응용력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었으나, 자신만의 실력 발휘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어 한자를 많이 알고 있었던 점은 구 제적부(호적)를 볼 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알기 힘든 글자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고, 옛날 어떤 이가 휘갈기듯 써 놓은 글자 역시 대부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는 역사를 반영한다. 1930~40년대의 제적에는 창씨개명된 호주가 많이 적혀 있어, 한눈에 보아도 한국식 성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강제 개명 이후의 성명을 제시하며 제적을 찾아달라는 부탁은 상당히 난도가 높다. 그러나 그런 요청이 올 때마다 일본식 성명의 독음이나 부수를 유추해서 끝내 대상자를 찾아내곤 했다. 본인의 스킬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기회도 있었던 셈이다.




  업무 시간에서 시행착오와 혼란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 보람과 여유뿐만은 아니었다. 공무원의 일상은 대체로 반복되어 예측이 쉬운 편이지만, 그 반복에는 악성 민원이 항상 일정 비율 이상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업무 체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에 제대로 답을 못해 폭언을 들었을 때는, 스스로의 책임임을 받아들이며 사태의 잘못을 자신에게 귀착시켰다. 하지만 일에 적응한 뒤부터 들은 욕설과 비속어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풀이와 인신공격의 대상이 될 때면, 무시당해 받은 분노와 그 상황에서도 상대에 강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결합해 내면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너 뭐야? 세금 처먹는 공무원이면서 일을 이 따위로 해!
빨리 팀장 나오라 그래!


  이러한 부류의 말에 갖가지 험한 말이 섞여 들어가면, 퇴근 후에도 밥이 잘 안 넘어가곤 했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민원인이 여러 차례 전화를 거는 날이면 전화 소리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늘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콜센터 직원 수준의 멘탈을 갖추지 못한 공무원에게, 악성 민원은 반복적으로 경험한다고 해서 적응이 될 만한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소란이 없는 평온한 날에도 곧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업무 전반에 익숙해지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업무 시간 동안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며 머리를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첫 번째 날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여도 이 정도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만 20세의 나이에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고 좇은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재정의된 순간이었다. 그 '누구나'라는 범주 안에 어느새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허무함과 거부감이 생긴 순간이기도 했다. 반복되는 일과 시간에 저 물음이 되풀이될수록 내면의 외침 뇌리에 번져 갔다.


'아무나', '누구나'라는 흔해빠진 카테고리 안에 속한,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 살아왔는가?

  의구심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무한히 번져 갔다. 그동안 새로운 삶에서 다시 출발하기 위해 잠재우고 있었던 질문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적성을 생각했을 때 이 길을 가는 게 옳았는가, 앞으로 이 삶을 퇴직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도 괜찮은가…. 그리고 그 끝없는 상념의 끝에, 드디어 회의에 짓눌려 꼼짝도 못 하던 자신을 움직이게 한 질문에 도달했다.




10년 전의 나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10살 더 먹은 지금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싶은 것 대신 해야 하는 것에 얽매여, 자신의 가능성을 묻어둔 채 살아가는 미래의 모습을 10년 전의 자신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삶, 바라고 성취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분명 무언가를 바꾸어야 했다.

  

  초조와 결의가 뒤섞인 채로 퇴근 후에 인터넷에서 방황하는 나날은 다행히도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우연히 발견한 브런치의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작가 신청을 해 보았던 것이다. 며칠 간의 기다림 뒤에 승인 소식을 받아 들었고, 그렇게 더 당당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 스타트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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