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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May 25. 2022

25살, 다시 문학의 곁에 서다

오랫동안 간직한 질문에 대한 잃어버린 대답을 찾는 여정


  여운을 남기는 시가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삶이 녹아든 스토리를 담은 소설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새로운 시와 소설을 접하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시와 소설이 문학 지문이 되어, 평가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결론을 시간 안에 내놓아야만 했던 시기였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중에서-


  문학이 시험의 일부였고, 시험이 삶의 전부였던 동안, 삶에서 처음으로 시와 소설이 주는 감각이 바랬다는 것을 느꼈다.  시가 함축성이 강할수록, 그리고 소설이 길어질수록 시험 점수는 위협을 받았다. 복잡 미묘한 시가 아리송한 문제와 엮일 때면,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는 구절을 떠올리는 낭만의 내면과 '최대한 그럴듯한 선지를 골라야 한다'라고 외치는 이성이 괴로우리만치 갈등하곤 했다.


  그런 충돌이 누적될수록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정신과 문학 간에 거리감이 생겼다. 문학을 왜 배우고 있는 것인지, 문학이 정말 학문의 일종이 맞는지, 하는 회의감이 그 사이를 메워갔다. 위대한 시인의 뼈 있는 글귀조차 회의에 물든 마음을 여운으로 장악하지 못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훨씬 즐거운] 질문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삶의 무대가 캠퍼스로 바뀐 이후에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문으로라도 문학을 강제로 접했던 지난 시절보다 시에 대한 접점이 줄어들었고, 경험할 것이 널려 있는 새로운 터전에서 삶은 소설이 파고들 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수식과 그래프로 가득한 경제학 교과서 구석에 섞인 재미없는 농담을 수사학적 표현으로서 문학의 일부로 취급할 수 있다면, 오직 그 미약한 문장들만이 이 두 눈동자에 비친 유일한 문학이었다.


  수업 시간의 발표 주제로 소설 한 권이 선정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문학이 다시 삶에 발붙일 기회를 얻었다. 저명한 작가의 독창적인 인생관과 철학이 스민 복문 하나하나가 주어진 과제를 최대한 빠르게 끝내려는 이의 눈길, 아니 발목을 잡아끌었다.


  다가오는 토플 시험에 늘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새내기는, 그 책이 왜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잡아당기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중요한 하나의 뜻을 복잡다단한 문장 속에 숨겨 놓은, 이역만리 그 어딘가에 사는 작가가 그저 얄미울 따름이었다.



따라서 공무원을 최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살기 위해 봉급이 필요한 자, 자신의 자리를 떠날 이유가 없는 자, 쓸데없이 서류를 뒤적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
-오노레 드 발자크, '공무원 생리학' 중에서-


이윽고 다시 해가 나고 닭이 울고 참새가 젖은 관목 속에서 깃을 퍼덕였고 모래 위에 생긴 물웅덩이는 발그레한 아카시아 꽃잎을 싣고 흘렀다. '아아, 이젠 벌써 멀리 갔겠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중에서-


  문학이 정신에 행사한 중력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연이 개입한 결과였다. 새내기 때 생각지도 않았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학점 부담이 없어져 흥미가 있었던 역사와 외국어를 주로 공부했다. 가장 높은 학년이 된 올해에도 패턴을 바꾸지 않고 역사 강의를 찾아다니다, 근대 프랑스 문학까지 테마로 같이 다룬 수업을 듣게 되었던 것은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수업은 문학 작품을 시대적 배경에 결부하여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작품 해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기에, 졸음이 엄습할 만도 한 오후 시간대의 75분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구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닐 수 있었다. 생각이 쉴 새 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이 귀를 통과할 때마다 상상이 나래를 펴는 것을 느꼈다. 펜은 움직임을 좀처럼 멈출 수 없었다.


  노골적인 만큼 뇌리를 강렬히 파고드는 화법, 행간 사이에 생각을 숨겨두는 절묘한 기술, 자신이 보고 느낀 사회상을 유려하게 이야기로 전환하여 전개하는 역량. 자신이 이 셋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문학을 배우는 이유를 깨달았다. 동시에 문학은 또 한 사람의 삶의 영역에서 당당히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단어들이 시험 범위라는 틀을 깨고 나오자, 시인이 삶을 노래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삶과 세상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가는 소설가의 탁월함이 못내 부러워졌다. 그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해내고 싶었다. 젊은 희망에도 이윽고 날개가 돋아났다.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샤를 보들레르, '취하라' 중에서-


  중간고사를 마치고 5월이 찾아온 것은 벌써 네 번째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4월은 벚나무가, 5월은 이팝나무가 지배한다는 섭리를 의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찬가지로 봄에 민들레를 보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긴 친구라면 죄다 불러 모은 푸르른 이웃들 사이에서 민들레가 홀로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이제야 눈치를 채게 된 것일까.


  일상이라는 단어는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매일에 둔감해진 나머지, 무언가 달라진 오늘을 어제의 연장선으로 일반화하여 오늘과 어제의 미묘한 차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거부하곤 한다. 플립 북의 페이지를 여러 장 넘겨야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무딘 우리의 시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 우리에게 삶을 한 장 단위로 넘겨볼 때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 아닐까?


  순간적으로 깊은 영감을 얻는 것, 감각을 언어로 승화하는 것, 그 말들을 뜻있게 이어 붙이는 것 중 무언가에 흠뻑 취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해낼 수 있는 자만이 문학가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받는다. 비록 그 반열에 드는 이들만큼 재능을 갖추진 못했으나, 젊음을 간직한 동안만큼은 그들의 이야기에 취하며, 이 손으로부터도 누군가를 취하게 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열망을 감히 품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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