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라는 기묘한 생태계
내게는 세 아이가 있다. 첫째 딸을 시작으로 네 살 터울의 아들, 그리고 다시 막내딸까지. 당연한 말이지만 이 셋은 성격도, 기질도, 심지어는 집안에서 뿜어내는 에너지의 색깔마저 완전히 다르다. 이 제각각인 삼 남매를 줄줄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다 보니, 나는 어느덧 한 학교의 담장 안에서 십 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오죽하면 보안실 선생님들께 '저는 이 학교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늘 여기 있네요' 라고 농담을 던졌을까.
첫째가 입학할 때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교정은 이제 내 집 앞마당처럼 익숙해졌고,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지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좋든 싫든 '학부모'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기묘한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살아야만 하는 긴 시간. 그 속에서 나의 인간관계는 아이들의 성장 속도만큼이나 극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첫 공개수업 날을 기억한다. 나는 말 그대로 내 아이의 뒤통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만난 학부모들이 "자기는 정말 자기 애만 보더라?"라고 농담처럼 던졌을 때, 나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그럼 공개수업에 내 자식 보러 오지, 남의 자식을 보나?' 싶었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이론을 맹신했고, 내가 세운 육아의 원칙이 정답이라 믿었다. 내 아이가 안 보이는 만큼 타인의 사정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피상적이었고, 타인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게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고요하게, 첫 번째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첫째와 네 살 터울인 둘째는 성별부터 다른 아들이었다. 여기에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치자, 내 안의 지루함 레이더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들 엄마들의 세계는 어떨까?"
모르니까 알고 싶었고, 알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인간관계의 에너지를 풀가동했다. 내성적인 엄마가 있으면 판을 깔아 이끌고, 아이도 어른도 다 같이 신나게 어울리는 '축제의 장'을 만드는 게 내 모토였다. 하지만 애를 쓴 만큼 소모적이었다. 인간관계에도 효율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가성비 최악이었다. 마음을 다 주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끝나는 관계들을 보며, 나는 관계의 유통기한이 내 열정만으로 늘어나는 게 아님을 배웠다.
셋째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관계의 '힘'을 뺐다. 첫째 때라면 상상도 못 했을 캐릭터의 엄마들과 각별해졌고, 싫으면 싫은 티를 내고 할 말은 하면서도 조력을 아끼지 않는 나로 존재했다.
신기한 건, 내가 나답게 행동할수록 곁에 남는 사람들은 더 단단해졌다는 점이다. 허심탄회하게 울고 웃으며, 아이라는 매개체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위로가 되는 관계. 누군가는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가 덧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자녀를 키우며 함께 비바람을 맞은 이 전우애 같은 관계가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세 아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거쳐오며 얻은 철학은 명료하다. 내게 좋은 사람이 다가왔을 때 그 사람과 좋은 인연이 되는 것은 순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
나의 단단한 원칙과 유연한 태도, 그리고 우리가 만난 시기적절성. 이 삼박자가 어우러질 때 인연은 비로소 삶의 선물이 된다. 관계의 유통기한을 억지로 늘릴 필요도, 그렇다고 미리 겁먹고 닫을 필요도 없다.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내 곁에는 딱 나만큼 좋은 사람들이 머문다.
지금도 가끔 첫째 때의 나를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난다. "선생님께서 질문하실 때 아이들 반응을 보셨어요?"라는 질문에 "아뇨, 제 애가 연필잡는 것만 봤는데요"라고 대답하던 그 무심하고 용감했던 초보 엄마.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세 아이를 거쳐온 지금의 내 안에도 여전히 그 시절의 캐릭터들이 뒤섞여 있다. 어떤 날은 여전히 내 애만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에너지가 과해서 오지랖을 부리다 밤잠을 설친다. 그러다 문득 셋째 엄마의 쿨함으로 돌아와 ‘인생은 각자도생이지’라며 시니컬해지기도 하니, 이쯤 되면 내 안에 세 명의 학부모가 번갈아 가며 구천을 떠돌고 있다.
놀라운 건, 이렇게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내 모습조차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떤 온도로 나타나든 “너 오늘 또 첫째 엄마 모드네?”라며 웃어주는 이들. 적응하면 지루해지는 나의 유별난 캐릭터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신선함으로 쳐주는 그들에게, 나는 오늘도 삶의 한 페이지를 빚지고 있다.
세 번의 변주곡이라는 멋진 말을 썼지만, 실제 연주 과정은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첫째 때는 연주가 시작된 줄도 몰랐고, 둘째 때는 꽹과리를 치듯 너무 시끄러웠으니까. 셋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 서툰 연주를, 누군가는 노련함이라 불러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