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만나는 여행] 조호바루에서의 고요한 실험

#1. 관광 대신 선택한 낯선 일상

by 온셀OnCeLL

01. 떠나고 싶다는 마음의 신호

변화가 없으면 숨이 막히는 나에게 한국의 겨울은 유독 길고 지루했다.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웠지만, 사실 내 안의 탐험가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뻔한 관광지 도장 깨기는 이미 시시해진 지 오래. 이번에는 정착민의 시선으로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기획하기로 했다.


02. 왜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였나

높은 환율의 미국과 호주를 제외하고, 겨울방학에 떠나는 만큼 따뜻한 여름 나라여야 했다. 필리핀과 태국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낙점된 곳은 말레이시아의 조호바루였다.


조호바루는 말레이시아 제2의 도시이자 싱가포르와 다리 하나로 맞닿은 국경 도시다. 신도시 특유의 쾌적한 인프라와 높은 치안 수준은 아빠 없는 삼 남매 육아라는 거대한 도전을 감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무엇보다 레고랜드와 국제학교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한국 반찬가게나 중고 거래 같은 한국인 커뮤니티가 활발하다는 점이 ‘생활형 여행자’인 내 마음을 움직였다.


03. 각자의 가방에 담긴 서로 다른 설렘

준비 과정은 분주했지만, 그 안에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색깔이 묻어나는 설렘이 넘실거렸다.

나: 낯선 도시를 직접 운전하며 누빌 나의 파란색 렌터카, 그리고 한국에서의 소음을 끄고 마주할 고요한 자유에 대한 기대.

중학생 큰딸: 한 달 동안 매일 먹게 될 망고에 대한 집념과, 한국의 학업 스케줄에서 잠시 벗어난 해방감.

둘째와 셋째: 눈앞에 펼쳐질 레고랜드의 화려함과 숙소 수영장에서 매일 첨벙거릴 생각에 부풀어 오른 마음.

친정엄마: 타지에서 손주들과 보낼 시간과 딸과 함께 떠나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호기심.


우리는 각자의 설렘을 가득 안고 떠났다.


04. 파란색 렌터카와 우핸들 하이파이브

유학원 패키지를 통해 숙소와 어학원을 결정했다. 현지에 사무실이 있는 조력자를 구하는 것은 나만의 안전망이었다.


가장 큰 도전은 운전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운전석이 오른쪽이다. "반대편 운전자와 오른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한다고 생각하라"는 누군가의 꿀조언을 되새기며 파란색 렌터카를 인수했다. 중앙선이 내 오른쪽 어깨에 닿는 기묘한 감각. 몇 번의 역주행 위기를 넘기며 조호바루의 넓은 도로를 누빌 때, 비로소 실감했다. 아, 드디어 나의 '지루함 탈출기'가 시작되었구나.


05. 낯선 세계로의 진입, 창이공항에서 육로까지

에어프레미아를 타고 6시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덕에 수속은 순조로웠다. 픽업 차량을 타고 국경을 넘어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길, 벤 안에서 여권을 건네고 얼굴을 확인하며 통과하는 입국 심사는 분단국가 국민인 나에게 그 자체로 생경하고 짜릿한 자극이었다.


어둠을 뚫고 도착한 조호바루의 숙소.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깨어있었다. 낯선 공기, 낯선 소음, 그리고 곧 펼쳐질 한 달간의 실험. 나는 이 지루함을 이기는 항해의 첫 페이지를 아주 공들여 넘기고 있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p8ygb1p8ygb1p8yg.png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한달살기


[여담: 사실은 이렇습니다]

파란색 렌터카를 고른 건 순전히 '내 차를 빨리 찾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아이들은 멀리서도 "와! 엄마다!"라며 환호했다. 한국이었다면 조금 쑥스러웠을 원색의 차량이, 이곳 조호바루에서는 나의 자유를 상징하는 깃발 같았다. 물론, 가끔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켜며 당황하고, 아이들에게 "엄마, 또 반대로 켰어!"라는 핀잔을 듣는 건 피할 수 없는 통과 의례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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