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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를 미워한다>

나에게 어른은 없었다.

by 진다르크

"언니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언니와 엄마가 너무 싫어요. 아빠와 저만 살게 해주세요."


중학교 1학년 때 가족들이 다 잠든 사이 책상에 앉아 조용히 두 손을 잡고 내가 기도한 내용이다.

언니들과의 편애와 엄마의 무시와 무관심에 가족들이 너무나도 싫어 이틀 동안 가출을 했었다. 친구 집에 얹혀살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위경련이 왔었다. 3일 만에 돌아온 집에서 신발장에 서있는 나를 훑어보더니 밥상 앞에 앉아있던 엄마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큰언니에게 말했다. "쟤 어디서 애 배고 온 거는 아니냐?"

그래도 걱정하며 앉아서 밥 먹으라는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엄마 또래이신 나와 친한 아주머니가 오셨다. 동네 헬스장에서 친해지게 되었는데 엄마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다정함과 사랑을 느꼈다. 동인천 역 앞에서 국숫집을 하셨는데 계산도 안 받으셨고 매번 헬스장에서 마주치면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주셨다. 아빠의 부고 소식에 바로 달려와주신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결국엔 계속 참았던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머니의 품에 안기며 소리 내어 크게 울음을 토해냈다. 아주머니는 나를 안아주시며 어루만져 주셨다. 꼭 이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다정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절을 하러 가시는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큰언니가 귓속말로 이야기하였다 "야 오버하지 마"


난 그 이후로 종종 생각한다.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우는 걸 보고 오버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올해 봄이었나. 엄마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감정이 격해진 나는 엄마에게 말하였다

"아빠는 엄마가 죽였어"

이제 연세도 드셨고 다소 직설적인 나의 말투를 보고 그래도 엄마가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주실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내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야 너는 뭐 잘한 거 있냐?"


더 이상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단 버튼을 눌렀다.

그날 저녁 언니들이 엄마에게 나에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다그치고 내 편을 들어줬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난 다시 한번 엄마를 평생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후두 암과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난 아직도 소주 병을 보기가 힘들고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우리 아버지는 외로워서 뼈저리게 고독해서 골방에서 소주에만 의지하시다가 돌아가신 거다. 그래서 간경화가 온 것이고 후두 암은 엄마가 병원을 늦게 데려가 건강이 더 악화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엄마를 원망했다.


그리고 아빠 장례식장에서조차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엄마였다.

"아니야 그래도 너네 엄마도 우시고 슬퍼하셨어"라는 외가 친척 언니의 통화 목소리에도 난 끝까지 부정하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요 언니 저희 엄마는 슬퍼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한 방울도 울지 않을 수가 있죠?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빠 병을 엄마는 알면서도 방치한 거예요. 엄마가 아빠를 죽였어요."


그 이후로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하면 장례식장에서 절대 눈물이 안 나올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생각도 안들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올해부터 엄마가 간 수치도 높아졌고 당뇨병 진단을 받아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는 큰언니의 소식에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 그래? 그래도 엄마 잘 먹고 씩씩하고 자전거랑 등산도 타고 다니잖아. 근력운동이랑 식단 관리 잘하라고 해"라는 의무적인 대답을 끝내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행복해 보이는 엄마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오히려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봐, 그럼 더 싫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말이다.


"야 그래도 미워도 부모는 부모야 너 나중에 분명히 후회한다? 있을 때 잘해드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시잖아 서툴러서 표현을 그렇게 하시는거야 마음은 그렇지 않아 네가 이해해 나중에 너도 애 낳으면 엄마 생각나고 그럴걸?"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친한 언니가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오히려 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게 되어 엄마가 되면 엄마를 더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내 새끼를 볼 때도 이렇게 사랑스럽고 이쁜데 아니, 지나가는 남의 자식인 어린아이들만 봐도 이뻐죽겠는데 엄마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왜 우리 엄마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아무리 삶이 고단하고 가난 속에 살았아도 자식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대하고 정서적 폭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20대 때 교제한 남자친구가 나의 본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고동 밥을 내어주시며 엄마와 나 그리고 남자친구는 어색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나의 흉을 보기 시작하였다.


"얘는 주워온 자식이야 우리 큰 애들은 얼마나 모범생인데 얘는 우리 집 돌연변이야."

당황해하며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친구가 말했다.

"어머니 그래도 제 앞에서는 그런 말 삼가해 주세요"

그러자 엄마는 매우 놀랜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남자친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동안 집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 훤히 보인다 아무리 막내딸이 미워도 그렇지 네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설령 그렇다 쳐도 어떻게 내 앞에서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셔? 너무 놀랐어 영진아 너 진짜 불쌍하다"

나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 남자친구의 어머님이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영진이가 좋은 가정환경과 좋은 부모님만 만났어도 더 잘 됐을 애야. 얼굴도 이쁘고 재능도 많고 똑똑하고 가진 게 많은 친구인데 참 안타깝다."


그동안 나에게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 난 혼자서 더더욱 책을 읽으며 멘토를 찾았고 신앙에 더 의지했었다. 엄마와 애착이 있었으면 고민 상담도 하며 방황했던 사춘기도, 힘들었던 20대 시절을 덜 힘들게 더 지혜롭게 보내지 않았을까.


내가 자존감 낮은 원인은 예전에는 부모님의 애착 결핍에 의한 것이라며 어릴 적 부모와의 애착은 평생을 간다며 엄마에 대한 원망심이 더 컸었는데 30대가 된 지금은 언제까지 부모님 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릴 적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의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고 스스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엄마는 나를 왜 미워할까. 언니들에 비해 내가 날라리 같아서? 가출을 했었어서? 엄마의 소원인 성직자의 꿈을 이루지 못해서? 아니면 당신과 너무 닮아서 꼭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언니는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엄마 그래도 네가 먹고 싶어 하는 반찬들 싸주시고 그러잖아"


올해 4월 혼자서 한 달 동안 로마 배낭여행을 다녀왔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한국인 모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대인 딸이 혼자서 로마 여행을 간다고 하니 딸이 너무 걱정되어서 절뚝거리는 발로 깁스를 하신 채로 따라오신 어머니.모녀는 강남구 대치동에 산다는 말과 더불어 조만간 딸이 유학을 가는데 제일 가까운 일본으로 보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과 함께.


과연 어떤 느낌일까. 엄마와 사이가 좋은 딸이 같이 목욕탕도 가서 때도 밀어주고 엄마와 쇼핑도 하고 카페에 가서 친구처럼 수다도 떨고 고민 상담이 있으면 엄마에게 털어놓고 서로 의지하는 느낌. 나는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느껴볼 수 없는 느낌이다.


사회적 인식도 사람들의 관념도 모녀는 대부분 사이가 좋거나 효도를 생각한다.

엄마를 생각하며 우는 딸의 모습이 나오는 방송도, 부모님을 생각하는 감동적인 노래 가사도, 나는 단한 번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난 꼭 내가 엄마가 된다면 친구처럼 수다도 떨고 인생 네 컷도 찍고 팔짱 끼며 쇼핑도 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미워도 엄마라고. 여전히 매년 명절과 엄마의 생신 때에는 언니를 통해 "이거 엄마 전해줘"라며 용돈과 선물과 과일을 보낸다.


엄마의 얼굴을 못본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계속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은 걸까,

가슴 한편에 그래도 엄마인데라는 죄책감과 미워하는 마음이 공존해있다.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혼란스러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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