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태도에 대하여
날씨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바람도
새하얗게 얼어버린 빙판길도
소복하고 기분 좋은 눈뭉치도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 번, 두 번 정도는
아직 떠나기 싫다고
우리의 발목을 잡고
투정 부리는 날이 있을 테지만
결국 다음에 찾아올
순수와 영원의 계절
그때까진 잠시
이별을 고해야겠죠.
저는 항상 주변 이들에게
감기 조심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겨울엔 춥다고 조심,
여름엔 독하다고 조심,
환절기에도, 그저 평범한 날에도
항상 이번 감기 조심하라고
늘 말을 합니다.
당신의 건강하길 바라는 나의 마음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조심스러움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감기라는 요소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이번 감기는 진짜, 진짜 독합니다.
환절기가 찾아오고, 옷이 얇아지는 계절이니
모두 언제나 건강하고 또 건강해서
다가올 봄의 꽃을 즐겁게 맞이하길
가볍게 바라고 있겠습니다.
이번 주는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마음이 무거운 일이 많아서
조금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에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습니다.
'죄책감 느끼고 아무것도 안 하기'
친구와 나누었던 이 주제의 짧은 대화가
못내 맘을 맴돌았습니다.
살아오며 저를 가장 아프게 한 생각
그중 하나를 이 문장이 담고 있어서
그래서 더 맴돌았습니다.
저는 잘 쉬는 걸 못합니다.
성인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서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삶을 시작한 이후로는
매일의 시간이 귀중하고
항상 달려야 안심했습니다.
놀고 있으면, 시간을 허비하면
이럴 거면 그냥 고향에 있지
하루에 나가는 돈이 얼만데
그 돈을 벌기 위해 고향에선
음식물 쓰레기까지 말려가며
돈을 아끼고 있는데
나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이곳에서
부모님의 푸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에 사무치는 날이 많았습니다.
가만히 쉬는 날도, 아무것도 안 하는 날도
마음은 항상 죄책감이라는 응어리가
실타래처럼 스스로를 조여왔습니다.
하루는 늘 그랬습니다.
주말 아침 어영부영 일어나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재미있고 빠져드는 것들에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의 절반을 낭비한 것 같아
나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혹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름대로 내가 성장한 것 같은
일들로 오전을 채우면
잠깐만 좀 쉬어야지
밥을 먹고 정리를 하고
조금 쉬고 있다 보면
시간은 어느덧 4~5시를 향하고
또 하루를 낭비한 것 같은 느낌에
죄책감이 느껴지고 괴로워하다
어영부영하던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어쩌다 1~2시에 일어나는 날이면
죄책감은 극에 달해 눈을 뜬 순간 숨 막히고
숨을 겨우 내쉬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어영부영, 어영부영
몸은 쉬고 싶어 하고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고
쉬고 싶은 몸에게
느림보, 거북이, 게으름뱅이
온갖 나쁜 말로
쉬고 싶은 마음을 다그치며
열심히 보낸 하루도
아무것도 안 한 날도
찜찜한 죄책감만 남았습니다.
참,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첫 인턴을 했던 회사에서
함께 계셨던 팀장님이
해주신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나이에 얼레벌레 살았는데,
치열하고 열심히 사는 게 대단하네요'
'얼레벌레'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대충대충, 엉성하게 와 비슷한 단어지만
단순하게 게으른 삶의 태도와는 다른
묘한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하루가 조금 부족하고 엉성해도
어떻게든 하루는 굴러가기에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 하루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낸 날
조금 엉망이더라도
그 엉망인 대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고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
그런 얼레벌레 사는 삶이
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엉망을 가볍게 넘겨버리는
그런 대범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얼레벌레
하루가 얼레벌레하면 그런대로
어영부영 죄책감을 느끼는 날도
즐기고 넘어갈 수 있는
대범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 살더라도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요.
이번 한 주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그럼에도 얼레벌레 넘어간 시간이 많아
생각을 이어가다 글로 맺어졌습니다.
아직도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괴로운 순간도 많이 있었지만
얼레벌레 넘어간 하루 속
틈틈이 숨어있는 재미를
가볍게 즐기고자 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오랜 친구의 전화
선물 받은 소소한 커피 한잔, 소금빵 하나
잔잔한 음악, 오랜만에 킨 고향 같은 게임
길거리에서 마주한 챱츄 리트리버 두 마리
어느 순간 마무리한 포트폴리오까지
행복할 것 같지 않나요.
얼레벌레, 그냥 하루를 보내도
죄책감보단 즐거웠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 시간이 지나면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은 잊히고
모든 하루가 즐거웠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하루들로 채워진 삶
길거리의 쓰레기와 소음보단
벽돌 사이에 핀 꽃 한 송이로
길을 걸어간 순간이 기억되는 삶
주변 이들과 다투고 서운해하지만
함께 나눈 즐거움과 감사한 것들로
관계를 가꾸어가는 삶
저는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 행복을 꼭 삶에 들이고 싶어서
앞으로는 더 마음을 가벼이 해야겠습니다.
이번 주, 얼레벌레 잘 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