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에서

최경민 단편 - 1

by 최경민

병원에서의 나는 유능한 간호사다. 업무는 밀리는 법이 없었고, 실수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인수인계를 할 때나 기록을 남길 때는 불필요한 사족을 철저히 줄였다. 감정보다는 정확함, 위로보다는 속도. 이곳에서 유효한 가치는 오직 그런 것들뿐이었다.

말을 아끼는 만큼 손은 빨라졌고, 손이 빠를수록 마음은 덜 흔들렸다.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표정을 읽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손끝이 무뎌진다. 손이 느려지면 실수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눈을 피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건조한 거리두기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이곳의 하루는 분침 위에서 숨 가쁘게 흘러간다. 아이들을 이름 대신 침상 번호로 부르고, 아이와 눈을 맞추기 전에 모니터의 심박 수치와 산소 농도를 먼저 훑는다. 보고할 때는 감정의 온도보다 숫자의 정확성이 중요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오직 화면 위에만 떠 있다. 나는 그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일한다. 그 선이 흐려지면, 일도 나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새벽 세 시의 병실은 낮보다 더 시리게 밝았다. 창백한 모니터 불빛이 얼굴을 비추고, 바짝 마른 공기가 폐를 채웠다. 약 냄새와 살균제 향이 뒤섞여 코끝이 아려왔다. 수없이 맡아온 익숙한 냄새였지만, 그날따라 유독 코끝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코드 블루, 58병동 코드 블루.”


스피커를 찢고 나온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 병동은 여전히 고요했다. 옆 병동의 다급함과는 무관하게, 이곳의 정적은 숨이 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누군가의 심장이 또 멈췄을 것이다. 이윽고, 내 머릿속을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여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다’였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슬픔 이전에, 처리해야 할 번거로운 행정 절차였으니까. 곧이어 그 생각이 내 안에서 서늘하게 맴돌았다. 내일도 이 병원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멈출 것이고, 그때마다 누군가는 감정 없이 죽음을 기록해야만 한다. 나는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모니터 위 파형을 확인하고, 마우스를 밀어 건조하게 차트를 넘겼다.

삑, 삑, 삑—

환자 모니터가 일정한 박자를 뱉어낼 때마다, 나도 그 리듬에 맞춰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선 그 기계음만이 평화의 증거였다. 언제나 전기가 공급되어야만 유지되는, 지극히 인공적인 평화.


오전 열 시 반, 병동은 이미 전쟁터였다. 모니터 경고음들이 겹겹이 울렸고, 약 냄새와 알코올 향이 뒤섞여 공기가 따갑게 폐를 찔렀다. 나는 수액 잔량을 곁눈질하며 기록지에 입력할 수치들을 정리했다.

조금 전 바빴던 순간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체온이 떠올랐지만, 지금 환자의 안색이 안정적이니 별일 없을 거라 판단했다. 9시 칸에 36.6, 11시 칸에 36.4. 나는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커서가 깜빡이며 ‘자동 저장’ 문구가 떴다. 숫자가 채워졌으니, 내 의무도 채워진 것이다.

그때 옆 침상에서 은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림이, 오늘은 열이 좀 내렸어요. 어제보다 훨씬 편해 보여요.”

보호자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은정은 아이의 손등을 조심스레 덮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늘 보던 얼굴인데도, 그녀가 웃을 때마다 병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건 따뜻함이라기보다, 금 가기 직전의 유리가 내는 투명한 비명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은정 선생, 오늘 오더 다 확인했어요? 지금 10시 정규 주사 다 투약됐어요?”

뒤쪽에서 차지 간호사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은정이 화들짝 놀라며 인계 내용을 적어둔 종이들을 허둥지둥 뒤적였다.

“아, 네, 아직 투약은—” “아직? 지금 투여 시간 지났어요.”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변 간호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을 피했다. 모니터 소리만이 눈치 없이 일정하게 이어졌다. 은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차지 간호사는 턱짓으로 스테이션을 가리켰다.

“환자한테 친절한 게 먼저가 아니에요. 시간 지키는 게 기본이에요. 내가 몇 번을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여긴 병원이에요. 감정 나누는 카페가 아니라.”

날 선 말들이 병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고,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은정 선생은 마음만 좋지, 일이 안 돼.”

“오늘 저희 또 늦게 가겠네요. 아, 진짜 짜증 나.”

“맨날 우리까지 남아서 수습해주는데, 은정 쌤은 미안한 줄은 아나 몰라.”

은정에 대한 노골적인 불평이 새어 나와도, 아무도 그 말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신 손끝으로 환자의 시트를 정리하며, 강박적으로 주름을 펴고 각을 맞췄다. 그게 내가 이 소란을 외면하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 침묵은 생존을 위한 예의였다. 누군가의 감정이 오래 남으면, 일의 속도가 늦어졌다. 나는 그걸 아주 오래전부터,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은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 환아 곁으로 돌아가 수액줄을 교체했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잠시 응시하다가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은 따뜻해 보였다. 하지만 그 온기가 곧 식어버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오후 교대 전, 환아들의 상태가 기적적으로 동시에 안정권에 머물렀다. 우연히 얻어걸린, 드문 여유였다. 늦게 도착한 식당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릴 뿐 조용했다. 식판 위의 국은 이미 식어 표면에 하얀 기름기가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음식이라기보다 오후를 버티기 위한 연료처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은정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넌 참 대단한 것 같아.”


나는 물을 한 모금 삼키며 건조하게 물었다.

“뭐가?”

“그냥, 일. 너는 늘 제시간에 다 끝내잖아. 흔들리지도 않고.”

“너도 잘하고 있어.”

의례적인 대답이었다. 식은 국을 삼키는 것처럼, 위로의 말도 내 안에서 미지근하게 겉돌았다.

“나, 아직도 가끔 환자 부모님이 울면 나도 같이 울어. 근데 그게 왜 이렇게 미안하지?”

“미안할 건 없지.”

“근데 다들 그런 눈으로 봐. 감정이 앞서면 일 못 하는 사람처럼.”

은정의 손가락이 젓가락을 쥔 채 꼼지락거렸다. 나는 식판에 반사된 형광등 불빛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피곤했다. 이 일을 오래 하려면 감정은 불필요한 짐일 뿐이다. 착한 건 죄가 아니지만, 효율이 없는 착함은 이곳에서 민폐가 된다. 은정은 아직 그 잔인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식판을 들고 일어서며 은정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도 언젠간 너처럼 익숙해질까?”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

내 대답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게 싫을 것 같아.”

그녀의 웃음이 마음에 턱, 하고 걸렸다. 나는 더 따뜻한 말을 해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빈 식판을 반납구에 밀어 넣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곳에선 진심이 오래 머물 자리가 없었다.

며칠 뒤, 은정은 다른 병동으로 옮겨졌다. 신규 간호사의 입사를 앞두고 한 명이 방출될 거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은정이 된 건, '일이 느린 간호사'를 솎아내려는 병동의 암묵적인 합의가 반영된 결과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심박수 그래프는 흔들림 없이 일정했다. 그 완벽한 직선의 흐름이, 마치 사람이 아닌 기계가 뱉어내는 숨소리처럼 느껴져 순간 목울대가 아려왔다.

아쉬운 마음은 사치였다. 나는 그저 다음 달 근무표를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이 있던 자리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 하얀 공백이 이곳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부품은 언제든 교체되고, 사람들은 금세 그 새로운 조립품에 적응하니까.

은정이 퇴직 의향서를 냈다는 이야기는 며칠이 더 지나서야 듣게 됐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은정이 이 일을 싫어한 게 아니라, 나처럼 무뎌질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미 무뎌지는 쪽을 택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은정이 떠난 뒤로, 병동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감정적인 지체도, 불필요한 위로도 사라진 공간. 모니터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알람은 정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근무표의 공란은 곧 새로운 이름으로 채워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은, 기억할 새도 없이 삭제되었다.

나는 요즘 들어 예전보다 조금 더 이르게 퇴근하게 됐다. 일의 흐름에 마찰이 사라지니, 멈추는 일도 줄어든 탓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고요가 찾아왔다. 병원 밖의 공기는 정돈된 냄새가 났다. 익숙한 하루의 끝인데, 어쩐지 퇴근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걸음이 휘청거릴 것만 같았다.

하루는 스테이션 아래 파쇄함이 꽉 차 있었다. 기계가 삼키다 만 종이 뭉치 사이로, 인계지 귀퉁이 하나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형광등 바람에 흔들리는 그 하얀 손짓이 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빼냈다. 익숙한 글씨체였다. 둥글고, 꾹꾹 눌러쓴, 은정의 것이었다.


‘체온 37.2도로 감소함. 환자는 괜찮다고 이야기하나, 다소 힘없는 표정을 보임.’

나는 그 문장을 한동안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고작 두 줄짜리 기록. 하지만 그 행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숫자 뒤에 마음을 덧붙였다. 37.2도라는 '사실' 뒤에, 힘없는 표정이라는 '진심'을. 그것은 이곳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문장이었으며, 그래서 가장 은정다웠다.

나는 파쇄기 투입구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결국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접힌 자국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사되었다. 그 빛이 순간, 따뜻하다기보다 베일 듯 서늘해 보였다. 나는 망설임을 끝내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은정의 마지막 문장을 씹어 삼켰다.

며칠 뒤, 은정이 쓰던 사물함 문짝에 새 이름표가 붙었다.

‘남지윤 간호사’

군더더기 없는 고딕체. 하얀 라벨 위로 정돈된 검은 글씨가 낯설게 번들거렸다. 지나가던 동료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번엔 좀 오래 버텼으면 좋겠네요. 펑크 그만 나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기계적으로 끄덕였다. 그 무미건조한 긍정이 내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동료가 사라진 뒤, 나는 라벨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이름표는 바뀌었지만, 그 아래에는 이전 주인이 남긴 끈적한 접착제 자국이 검게 뭉쳐 있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손끝에 더 지저분하게 들러붙는, 떼어낼 수 없는 미련 같은 것들. 손끝이 묘하게 차가웠다.

교대 후, 탈의실에 들러 습관처럼 그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안쪽 공기는 여전했다. 구석에는 은정이 두고 간 낡은 머리끈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늘어나서 탄력을 잃은 고무줄. 그녀가 이곳에서 버텨온 시간의 질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나는 잠시 그것을 쥐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 퉁,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곧 다른 쓰레기들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며칠 뒤 근무표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입력되었다. ‘남지윤’이라는 세 글자. 이 병동은 정원이라는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기계 같았다. 누군가 마모되어 빠져나가면, 규격에 맞는 새 부품이 끼워진다. 사람이 줄어드는 일은 없다. 단지 이름만, 라벨만 바뀔 뿐이다.

지윤은 그다음 날 처음 출근했다. 새 유니폼에서는 빳빳한 풀 냄새와 낯선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아직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옷을 입고, 그녀는 낯선 공간을 조심스레 훑었다. 손에 쥐어진 첫 근무표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고 있는, 누구보다 잘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의 표정.

“첫날이라 긴장되죠?”


내가 묻자, 지윤은 화들짝 놀라며 멋쩍게 웃었다.

“아, 네... 그래도 괜찮아요. 정신이 좀 없어서요.”

그 대답이 기시감처럼 등골을 스쳤다. 예전에, 이 자리에서 누군가도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했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여기 수액 라인 이중 확인은 언제 하는 건가요?” “투여 전. 지금은 복잡해 보여도, 곧 익숙해질 거예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 “익숙해질 거예요.” 그 말은 위로였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 병동에서 가장 권장되는 미덕이자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지윤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그 말이 정답이라도 되는 양 수첩에 받아 적었다.

그 맹목적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파쇄기 속으로 사라진 은정의 문장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복도 끝, 심박동 모니터가 붉은빛을 깜빡였다. 나는 도망치듯 눈을 돌렸다.

지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일의 리듬을 익혔다. 더듬거리던 타자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경쾌해졌고, 클릭 소리는 단호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일었다. 메모지에 체크 표시를 빽빽하게 남기고, 잠을 줄여가며 기계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애쓰던 시절.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윤의 몸짓은 그 시절의 나를 복제한 듯 닮아 있었다. 그것이 이 병동에서의 ‘성장’이라면, 나는 이미 다 자라다 못해 굳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건조한 사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더 이상 자랄 것도, 다칠 것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지윤 쌤, 오늘도 남아요?”

“네, 이것만 정리하고 갈게요.”

가끔 그 대답이 낯선 파열음처럼 들렸다. 지윤은 기록을 마친 뒤에도 아이의 이불을 한 번 더 덮어주며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조금 더 잘 자네요.”

지윤은 여전히 보호자에게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이면 주변의 분주한 흐름이 잠시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고, 누군가는 혀를 찼다.

“쟤도 저러다 곧 상황 터지면 울겠다.”

“은정이랑 똑같네. 초반에 다 저러다 지치지.”

스테이션 안의 말들은 수액 방울처럼 조용하고 일정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 파장은 오래 남았다. 퇴근 무렵, 탈의실 칸막이 너머로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하기만 하면 오래 못 버텨요. 일할 땐 냉정해져야 하는데, 신규들은 꼭 감정을 섞으려고 해.”

“그래도 은정 선생님보다는 낫지 않아요? 걔는 아예 일을 포기했었잖아.”

나는 그, 날 선 말들 사이에서 숨을 죽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대신 닫혀 있는 지윤의 사물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사물함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안의 주인은 아직도 병동에 남아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을 터였다. 사물함 위로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렸다. 그 불규칙한 점멸이 꼭 지윤의 위태로운 열정 같았다.

나는 남은 옷깃을 여미다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여자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누구도 아니었다. 건조한 병원 공기에 마른 피부, 충혈된 눈, 그리고 감정을 지운 무표정한 입매. 그것은 늦은 밤 퇴근길의 지하철 차창에 비친 얼굴이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스치듯 마주쳤던 텅 빈 얼굴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오늘 하루를 겨우 버텨낸 누군가의 흔한 얼굴. 그래서 낯설었고, 동시에 끔찍하게 익숙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나라는 껍데기를 쓴 시스템의 부속품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름표를 확인하듯, 거울 속 눈동자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날따라 병동의 공기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근무 중, 한 환아가 고열로 칭얼거렸다. 지윤은 반사적으로 달려가 아이의 머리맡을 지켰다. 물수건으로 이마를 식혀주고, 불안해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흐름을 멈추고 온기를 나누는 일. 그것은 지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버릇이었다.

“괜찮아. 선생님 여기 있어. 조금만 참아보자, 응?”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스테이션에서 차지 간호사의 건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지윤 선생님, 라운딩 중에 카트 멈추고 뭐 하세요?”

지윤이 놀란 토끼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아이는 다시금 불안한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환아 체온이 몇 도죠?”

“38.1도입니다.”

“그 정도면 해열제 투여하고 지속 관찰로 넘기면 돼요. 거기 붙어 있는다고 열 내리는 거 아니에요. 다른 환자들 루틴 체크 다 밀리고 있잖아요.”

말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단단한 벽돌 같았다. 지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흐름이 막힌 병동의 공기가 뻑뻑해졌다.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정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팔로우업(Follow up) 하겠습니다. 지윤 선생님은 라운딩 마저 도세요.”

나는 끼어들었다. 동료를 돕겠다는 선의가 아니었다. 그저 멈춰버린 병동의 톱니바퀴를 다시 굴리기 위한, 기계적인 처방이었다. 차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은 말없이 자리를 비켰다. 아이의 손을 놓은 그녀의 손끝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조금 떨렸다. 그때 알았다. 내 말은 상황을 수습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온기를 강제로 삭제해 버린 말이었다.

오후 회진 시간, 우려는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의사가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이건 왜 보고가 누락됐죠?”

“아... 아까 체온이 조금 내리는 추세라... 확실히 떨어지면 다시 확인하고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다시 확인’이 아니라 ‘보고 누락’입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복도에 차갑게 울렸다. 병실 안의 모든 시선, 보호자들의 불안한 눈빛이 지윤의 등 뒤로 꽂혔다.

“죄송합니다.”

지윤의 목소리는 바스러질 듯 작았다.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만 해도 붉고 따뜻해 보였던 그녀의 손은, 이제 피가 통하지 않는 석고상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판단은 의사가 합니다. 간호사가 임의로 판단해서 보고 미루면, 그 사이에 애 잘못되면 책임질 겁니까? 이건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에요.”

의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트를 덮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다시 검토하고 교육하겠습니다.”

차지 간호사가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의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음 병실로 이동했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삑, 삑, 삑―.

오직 모니터만이 눈치 없이 일정한 리듬으로 울어댔다. 지윤은 그 자리에 박제된 듯 서 있었다. 눈가는 붉게 달아올랐지만, 울지는 않았다. 다만 하얗게 질린 손끝만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션 파티션 너머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입 안에서 맴도는 말들은 모두 변명 아니면 훈계뿐이었다. 그 어떤 말도 지금의 지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힐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비겁한 침묵을 택했다.다.

저녁 무렵, 스테이션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들떴다. 간호사 둘이 차트를 정리하며 낮은 목소리를 섞고 있었다.

“아까 그거 봤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데. 역시 멘탈이 너무 약해.”

“그래도 일 배우는 속도는 빠르지 않아?”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착한 척하는 건지, 미련한 건지. 저러다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거, 한두 번 봐요?”

말들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먼지처럼 부유하다 흩어졌다. 누군가의 진심이 이곳에서는 그저 심심풀이 안주거리로 소비되고 있었다. 그 시간에도 지윤은 환자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지윤은 환아의 손을 다시 잡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멍하니 온도계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이의 얼굴 대신 붉은 디지털 숫자만이 건조하게 비쳤다. 나는 그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방관은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니까.

병동은 다시 익숙한 리듬을 되찾았다. 일정한 기계음, 오차 없는 움직임, 감정이 끼어들 틈 없이 돌아가는 효율적인 속도. 나는 건조해진 지윤의 등을 보며 오래전의 은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곁에서 침묵했던 그때의 비겁한 나를. 모두가 무언가를 죽여가며 견디고 있었다. 그게 이 병동의 생존 방식이었다.

복도를 나설 때, 스테이션의 불빛은 여전히 눈 시리게 밝았다. 불이 꺼지지 않는 병동은 늘 똑같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독한 소독약 냄새, 찌든 피로의 냄새, 그리고 사람을 지우고 남은 멸균된 공기의 냄새. 나는 그 질척한 냄새에서 벗어나려 코트 깃을 단단히 여몄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발걸음이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지윤의 얼굴이 자꾸만 잔상처럼 떠올랐다. 붉게 충혈된 눈가와, 떨리던 입술로 내뱉던 “괜찮아요”라는 말. 그 말은 기시감처럼 나를 괴롭혔다. 예전에도 비슷한 톤, 비슷한 표정으로 그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은정이었다.

나와 은정이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은정은 아이가 잠든 병실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나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 사무적인 말투로 그녀를 불렀었다.

“은정아, 감상 젖을 시간 없어. 아직 스테이션 일 남았잖아.”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그때는 그게 동료를 위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잔인한 통제였고 비겁한 방관이었다. 그날 은정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며칠 뒤, 탈의실 구석에서 은정이 숨죽여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달 근무표를 확인하며 내 안위만을 챙겼다. 그게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하고 싶었던 전부였다.

주차장 지하 2층.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단된 공간이 주는 고요함이 밀려왔다. 시동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차창 밖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하얀 마스크에 질끈 묶은 머리. 지윤이었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좁은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손끝으로 눈가를 거칠게 훔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시동 버튼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지윤의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은정이 떠나던 날의 마지막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은정이 떠난 뒤, 나는 몇 번이나 메시지 창을 띄웠었다.

[잘 지내?]

그 짧은 세 글자는 늘 전송 버튼을 넘지 못하고 내 안에서 증발했다. 안부를 묻는 것조차 자격이 필요한 것 같아서. 혹은, 그 답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켜진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뒷걸음질 치듯 손가락을 떼곤 했다. 보내지 못한 말들은 손끝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식어갔다. 차창 밖의 밤공기도, 내 손끝에 남은 온기도 차갑게 식어갔다. 그 서늘한 감각이, 아주 오래 묵은 죄책감과 닮아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밀폐된 차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지윤 선생님.”

그녀가 놀란 사슴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선생님.”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눈가는 짓무른 듯 붉었고, 하얀 마스크 안쪽은 축축하게 젖어 색이 변해 있었다.

“버스 기다려요?”

“네. 근데 배차 간격이 좀 기네요.”

“이 시간엔 거의 안 와요. 타요, 데려다줄게요.”

지윤은 잠시 뒷걸음질 치며 머뭇거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른 선생님들도 계실 텐데…”

“그래서 태워주는 거예요. 울고 있는 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또 말 나와요. 내일 또 입방아에 오르고 싶어요?”

내 말투는 건조했다. 그건 배려였지만, 동시에 지극히 계산된 통제였다. 지윤은 내 말에 힘없이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차 안은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창밖의 도시 불빛만이 유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윤은 손끝으로 마스크 끈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렸다. 팽팽해진 고무줄이 그녀의 손가락을 파고들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굳이 말을 걸지 않고 핸들만 꽉 쥐었다.

“오늘….”

한참 만에 지윤이 조심스레 정적을 깼다.

“제가 많이 혼났죠.”

“누구나 처음엔 그래요.”

“근데… 그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녀는 답답한 듯 마스크를 벗으며 긴 숨을 토해냈다.

“혼난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요. 뭔가, 제가 선생님들을 더 힘들게 하는 짐이 된 것 같아서….”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환자를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보다 저 아픈 아이가 더 괜찮아 보인다’. 나는 지금 엉망진창이구나.”

그 자조 섞인 고백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룸미러 대신 옆 유리를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밤, 차창은 거대한 검은 거울이 되어 있었다. 그 속에 비친 지윤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흐릿하게 겹쳐졌다. 울다 지쳐 붉어진 눈과, 일에 찌들어 건조해진 눈. 생기를 잃어가는 얼굴과, 이미 생기를 거세당한 얼굴. 그것은 시간차를 둔 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끔찍하게 닮아 있었다. 지윤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저, 괜찮아요. 그냥 좀… 갑자기 서러웠던 것뿐이에요.”

나는 신호 대기 중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다시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어깨의 들썩임도 없이.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눈물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의 배설이라기보다, 몸 안에 고인 슬픔을 물리적으로 빼내는 행위 같았다.

“지윤 선생님.”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처럼만 하면 돼요. 곧 익숙해질 거니까.”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병동에서 수없이 반복 재생되던, 영혼 없는 매뉴얼이었다. "익숙해진다"는 저주를 위로랍시고 건네는 내 모습이, 기계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윤은 눈물을 닦으며 안도한 듯 작게 웃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진짜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방향등을 켰다.

똑, 똑, 똑.

방향지시등 소리가 심박동 측정기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좁은 차 안을 울렸다. 주황색 불빛이 점멸할 때마다 지윤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가 어둠 속으로 잠기기를 반복했다.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저 온기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심 저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향등이 꺼지는 순간, 차 안은 다시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그 어둠 속에는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온기도 남지 않았다.

며칠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 병동은 다시 익숙한 궤도로 복귀했다. 모니터의 비프음, 고무 밑창이 복도를 스치는 소리, 차트가 넘어가는 건조한 마찰음. 그 모든 소음이 제자리를 찾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지윤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여전히 환자들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의 농도가 달라져 있었다. 입꼬리는 정확한 각도로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는. 철저히 계산된 친절이었다. 실수는 사라졌고, 차트 기록은 매끄러웠다.

“요즘은 일 많이 늘었네. 이제 좀 간호사 같아.”

차지 간호사의 칭찬에 지윤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대답의 속도가 낯설었다. 망설임이나 부끄러움이 거세된, 병동의 리듬에 완벽하게 조율된 어조였다. 스테이션 옆에서 약을 정리하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한 손으로는 앰플을 톡톡 튕겨 따고, 다른 손으로는 마우스를 굴려 차트를 넘겼다. 손끝은 기계처럼 정확했고, 표정은 서늘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모니터 불빛이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맑았지만, 셔터를 내린 가게처럼 닫혀 있었다. 그날 오후, 회진을 기다리던 환아의 부모가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이 오늘은 좀 어떤가요?”

지윤은 매뉴얼에 적힌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정적이에요. 수치도 정상 범위고, 별다른 통증 호소도 없어요.”

정확했고, 완벽했다. ‘아프지 않다’가 아니라 ‘통증 호소가 없다’는 표현. 환자의 고통을 주관적인 호소가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로만 치환하는 화법. 나는 그걸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드디어 그녀가 이 세계의 언어를 익혔구나. 하지만 동시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 완벽한 대답에는 아이의 ‘기분’이나 ‘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으니까.

균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보호자 한 명이 격앙된 목소리로 스테이션을 찾아왔다.

“아까부터 애가 힘들다고 하는데, 왜 아무도 안 와봐요?”

날카로운 항의에 차지 간호사가 입을 열기도 전, 지윤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녀가 병실로 뛰어 들어가자,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지윤은 반사적으로 침상 난간을 내리고 아이의 손을 쥐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왔어. 미안해, 조금만 참자.”

그 말에 환아의 어머니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얘가 계속 아프다고 했잖아요…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지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보고하고 조치할게요.”

복도로 나오자마자, 차지 간호사가 지윤을 구석으로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지윤 선생님. 그럴 땐 보호자 앞에서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지 마세요.”

“네? 하지만 제가 늦게….”

“늦은 게 아니라, 라운딩 순서대로 간 거예요. 선생님이 자꾸 사과하면 우리 과실을 인정하는 꼴이 돼요. 보호자들은 더 불안해하고요.” “…….”

“일단 침착하게 상황 설명부터 해요.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지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기록을 작성했다. 타닥, 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은 여전히 정확했고, 차트를 읽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마우스를 쥔 그녀의 오른손 검지가, 미세한 진동처럼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그 떨림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은정의 마지막 표정이 겹쳐졌다. 이 일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칠 수도 멈출 수도 없어 질려버린 사람의 얼굴.

나는 위로를 건네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지금의 지윤에게는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조차 겨우 붙들고 있는 평정이 깨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모니터 속의 숫자 뒤로 숨는 것을 택했다.

그날 이후, 지윤은 환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보호자와 마주칠 때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고, 습관처럼 앉아 있던 아이의 머리맡에는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정확하고 조용하게 차트의 빈칸을 채웠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감정이 배제된 타자 소리. 그 정밀함은 흡사 잘 세공된 기계 부품처럼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함이, 내게는 이상하게 슬펐다.

오후 2시, 병동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지윤이 담당한 구역의 환아들은 오전 회진 이후 수치가 안정적이었고, 모든 것이 통제하에 있는 듯했다. 그 평온함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후 2시 10분.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찢었다. 모니터가 비명을 질렀다.

“지윤 선생님, 어디예요!” “3번 병실이요! 승민이에요!”

우리는 반사적으로 복도를 박차고 나갔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흉곽의 움직임이 멈춰 있었고, 모니터의 산소포화도 수치는 벼랑 끝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승민아! 승민아! 선생님 목소리 들려? 눈 좀 떠봐!”

지윤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아이를 잡은 손끝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승민아, 제발… 이러지 마….”

간절한 비명은 거기까지였다. 지윤은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가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나는 몸을 돌려 응급 카트로 향했다. 의자가 넘어지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지만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카트 바퀴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복도를 질주했다.

“코드 블루! 3번 병실, 코드 블루!”

사이렌 소리가 병동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지윤의 압박 리듬은 소름 끼칠 정도로 일정했다. 하나, 둘, 셋, 넷. 그것은 살리려는 사람의 몸짓이라기보다, 멈춰버린 심장을 억지로 펌프질하는 기계의 왕복운동 같았다. 흔들림 없는, 그래서 더 절박한 리듬.

내가 카트를 끌고 병실로 뛰어들자, 의사와 차지 간호사가 동시에 들이닥쳤다.

“리듬 확인했어요?”

의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아이의 가슴 정중앙에 꽂혀 있었고,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확인 중입니다! 브이 핍(V-fib)입니다!”

내가 대신 소리쳤다.

“셋에 교체합니다. 준비! 지윤 선생님, 들려요? 비키세요!”

대답은 없었다. 지윤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입술은 주문을 외듯 파르르 떨렸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아이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멈추는 순간, 아이가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릴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지윤 선생님! 교대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지윤의 압박은 멈추지 않았다.

“하나, 둘, 셋에 교대합니다! 하나, 둘, 셋!”

의사가 지윤을 거의 밀쳐내듯 침대 밖으로 끌어내렸다. 바닥으로 밀려난 지윤은 비틀거리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두 손은 허공에서 여전히 흉부 압박을 하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심실세동입니다. 제세동 150줄(J) 충전.”

“충전됐습니다.”

“물러나세요! 샷!”

쿵. 아이의 작은 몸이 튀어 올랐다 떨어졌다.

“리듬 변화 없어요.”

“한 번 더 충전. 에피네프린 원 앰플 주세요.”

나는 기록지를 꺼내 들었다. 내 손끝은 감정을 삭제하고 오직 사실만을 기록했다. 14시 25분 제세동. 14시 27분 에피네프린 투여.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숫자를 받아 적는 서기.

문득 옆을 보았다. 지윤은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끊어진 아이의 맥박을 자신의 손목에서라도 찾으려는 사람처럼.

빈 앰플 병이 트레이 위에 쌓여갔다. 얇게 떨리던 심전도의 선이 몇 번의 파형을 그리다, 이내 길게, 아주 길게 뻗어 나갔다. 삐― 단조로운 기계음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직선이었다. 나는 시계와 기록지를 번갈아 보았다.

의사가 거칠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시계를 응시했다.

“14시 32분. 사망 선언합니다.”

무거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누군가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금속 트레이 위에 가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의료진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거나 차트를 정리했다. 그때였다. 아이의 축 늘어진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 하고 떨렸다. 전기 충격의 여파인지, 마지막 신경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았다. 이미 모니터의 직선이 '죽음'을 확정 지었으므로. 시스템이 종료를 선언한 육체에는, 더 이상 시선이 머물지 않았다.

지윤은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서 있었다.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하지만 단호하게 잡았다.

“…. 잠깐 나가서 물 한 잔 마시고 와요.”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은 바닥 타일에 들러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병실을 나서려던 순간, 그녀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제가… 마지막 확인을… 너무 늦게 했어요.”

그 자책은 너무 작아서 공기 중의 먼지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아무도 듣지 못했고, 들어줄 여유도 없었다. 복도 끝 비상구 등의 초록 불빛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그 아래 지윤의 그림자가 구겨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 조용히, 숨을 내쉴 때마다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오래전 떠나던 은정의 뒷모습이 겹쳐져 잔상처럼 떠올랐다.

병실 안의 정적이 가라앉자, 공간은 빠르게 본래의 기능을 회복했다. 모니터의 비프음, 인공호흡기의 규칙적인 바람 소리, 의료폐기물을 정리하는 부산한 발소리. '죽음'이라는 이벤트는 종료되었고, '일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재부팅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익숙한 손놀림으로 피 묻은 장갑을 뒤집어 벗었다. 쩍, 하고 고무가 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폐기물 통에 장갑을 던져 넣었다. 손끝에 남은 땀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죽은 아이의 온기 대신, 살아남은 자의 비릿하고 끈적한 체온만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때, 수간호사가 차트를 정리하며 내 쪽을 보았다.

“선생님, 밖에 신규 선생님 울고 있던데요. 잠깐 달래주고 들어와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이미 다음 환자의 오더를 훑고 있었다. 그것은 동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감정적 잔여물을 신속히 처리하고 복귀하라'는 업무 지시에 가까웠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병동 밖으로 걸어 나왔다.

복도 끝 비품실 앞, 어둠이 고인 구석에 지윤이 서 있었다.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차가운 벽에 위태롭게 기대어 있었다. 자신의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손끝을 멈추지 않고 떨고 있었다. 아직도 CPR의 감각을 털어내려는 듯이.

“지윤 선생님.”

내가 다가서자 그녀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실핏줄이 터진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괜찮아요.”

목소리가 갈라져 쇳소리가 났다.

“그냥… 갑자기 숨이… 숨이 안 쉬어져서요.”

과호흡이었다. 공포와 죄책감이 기도를 막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마스크 내려요. 그리고 천천히 숨 쉬어요. 괜찮아요.”

지윤은 떨리는 손으로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입술 사이로 짧고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도 흐느낌도 없이, 그저 몸 안의 물기를 짜내듯 눈물만 툭툭 떨어졌다.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도, 등을 두드려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가운 주머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다들 그랬어요. 처음엔.”

내 목소리가 의도보다 낮고 차갑게 깔렸다. 지윤은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그 울음은 슬픔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생리적인 구토 같았다.

잠시 후,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죄송해요. 금방… 들어갈게요.”

그 말이 끔찍하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슬픔을 억누르고 기능을 회복하려는 그 단념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등을 돌렸다.

병동은 여전히 익숙한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니터의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 붉은 점멸이 눈 안쪽에 잔상으로 오래 남았다. 문득, 은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난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웃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마지막의 무력한 표정으로만 기억됐다.

그날, 복도 끝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은정의 얼굴. 그 얼굴이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지윤과 겹쳐졌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윤의 울음이 복도 벽 어딘가에 스며든 것 같았다.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 자국처럼, 그 축축한 슬픔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교대 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유니폼을 벗어 던지자 땀 냄새와 소독약 향이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그것은 오늘 하루, 누군가의 죽음 곁에서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이자, 씻어내고 싶은 죄책감의 냄새였다.

퇴근길의 복도는 고요했지만, 완전히 정적은 아니었다. 벽 안쪽 배관을 타고 쉬이익, 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환자들에게 공급될 산소가 흘러가는 소리. 거대한 건물이 숨을 쉬는 듯한 그 일정한 소리 사이로, 느릿한 발소리가 겹쳐졌다.

지윤이었다. 마스크가 턱 밑으로 반쯤 내려가 있었고, 닦아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마른 뺨 위에 얼룩져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위로도, 격려도, 그 어떤 말도 지금은 소음일 뿐이었다.

지윤이 먼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녀의 좁은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위태롭게 흔들렸다.

“선생님은요.”

물기 어린 목소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처음 아이를 보냈을 때… 우셨나요?”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기억을 더듬었지만, 떠오르는 건 흐릿한 차트와 바쁘게 움직이던 손뿐이었다.

“글쎄요. 그땐… 슬퍼하기엔 일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지윤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게 제일 무서워요.”

“뭐가요?”

“일이 바빠지면, 슬픔이 삭제된다는 게요.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녀는 말라버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핏기가 돌지 않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근데요, 아까는 선생님이… 좀 부럽기도 했어요.”

“…….”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단단해 보여서. 그래서 계속 일할 수 있는 거니까.”

그 말에 명치가 묵직해졌다. 나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섰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럼요?”

“그냥… 미뤄두는 거예요. 지금 무너지면, 남은 아이들을 볼 수 없으니까.”

지윤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직, 사람을 잃고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차트를 쓰는 게… 너무 끔찍해요. 이게 익숙해지면, 저도 괴물이 될까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골랐다.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거짓 위로가 아닌, 서늘한 진실뿐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게… 꼭 괜찮아졌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럼 뭐예요?”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 버티는 거죠. 아니….”

나는 말을 고쳤다.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남겨진 거예요. 우리는.”

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묻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괜찮냐고. 나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잊혀지지는 않아요. 그냥… 안고 가는 거죠.”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벽 안의 산소 흐르는 소리만이 쉬이익, 하고 우리의 귓가를 스쳤다. 지윤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안고 가볼게요. 무겁겠지만.”

그녀는 꾸벅, 인사하고는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 회전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그녀의 뒷모습이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복도 끝의 비상구 불빛이 멀어지자, 그제야 참았던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지윤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겨우 침대에 도착한 나는 쓰러지듯 누웠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화면을 켰다. 주소록 스크롤을 내리자, 여전히 지우지 못한 그 이름이 있었다.

‘이은정’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매번 망설이다 지워버렸던 이름. 하지만 오늘은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아주 오랜 숙제를 하듯 문자를 입력했다.

[잘 지내?]

전송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짧게 흔들렸다. 슈욱, 하는 전송음이 고요한 방 안에 작게 울렸다. 그 소리가 병동의 모니터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심장 박동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한참 동안 액정 화면을 바라봤다.

몇 분 뒤, 숫자 ‘1’이 소리 없이 지워졌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 하얀 여백을 바라보며, 나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답장이 없다는 건, 변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도 어디선가 나처럼, 말 없는 전쟁을 치르며 오늘을 살아냈다는 뜻일 테니까. 그 침묵이 처음으로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내온 고요한 생존 신고였다.

창밖은 새벽이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깜빡였다. 그 빛들이 숨을 고르듯 번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미세한 열기가 손끝에 닿았다. 그 온기를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