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

최경민 단편 - 4

by 최경민

상경관 402호의 공기는 언제나 바스락거릴 정도로 건조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낡은 공기청정기 팬 소리, 구석에 쌓인 계량경제학 서적들 위로 내려앉은 먼지,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마른기침 소리. 습도계의 바늘은 20퍼센트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고, 연우는 자신의 피부가, 아니 영혼이 얇은 종잇장처럼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입안이 까끌거려 혀로 입천장을 훑었다. 모래알이 씹힐 것만 같았다.

"야, 그래서 내가 숏을 쳤는데, 이게 말도 안 되게 반등을 하는 거야. 기가 차서, 진짜."

박사 과정 3학기인 영훈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낄낄거렸다. 탕비실 쪽에서는 종이컵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 거기는 세력이 붙었다니까요. 정보방에서 그러는데 다음 주에 호재 하나 터진대요."

"정보방? 너 아직도 그런 데 믿냐? 야, 남자는 차트야. 기세라고, 기세."

그들의 대화는 코인 시장의 변동성이나, 어제 회식 자리에서 나온 주식 정보, 혹은 헬스장 벤치프레스 증량 따위에 대한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접착제가 발려 있는 듯했다. '우리'라는 울타리. 그 안에 악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언어에는 연우가 감히 끼어들 틈이 없는 견고하고 거친 결이 존재했다. 연우는 모니터 속 엑셀 시트의 숫자를 노려보며, 그 소음들을 배경음악처럼 흘려보내려 애썼다.

"이연우, 너도 이번에 좀 들어가지 그랬냐. 형이 소스 줬잖아. 이거 진짜 확실한 건데."

영훈이 불쑥 연우의 의자 등받이를 잡고 흔들었다. 훅, 하고 땀 냄새와 섞인 텁텁한 멘솔 담배 향이 끼쳐 왔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저는... 여유 자금이 없어서요. 그리고 그런 건 잘 볼 줄 몰라서..."

"에이, 재미없는 놈. 남자가 배포가 없어서 어디다 쓰냐. 야, 가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게."

영훈이 연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무리를 이끌고 우르르 나갔다. 문이 닫히자, 왁자지껄한 소음은 복도 너머로 멀어졌다. 남겨진 것은 매캐한 잔향뿐이었다. 연우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이 두고 간 '재미없는 놈'이라는 꼬리표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사자 무리에 섞인 초식동물처럼, 혹은 콘크리트 바닥에 핀 이끼처럼.

연구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짙은 초록색 잎을 가진 동양란과 스투키, 몬스테라 화분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 삭막한 회색 건물에서 유일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는 생명체들. 모두가 숫자와 효율, 정복과 승리를 이야기할 때, 연우가 유일하게 안식을 느끼는 대상이었다. 그는 분무기를 집어 들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물방울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잎사귀에 물방울이 맺히고, 마른 흙냄새가 비에 젖은 흙내음으로 바뀌는 순간. 연우는 젖은 잎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잎사귀 하나하나의 먼지를 닦아내는 그 단순한 행위만이, 자신이 여기서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등 뒤에서 낮지만 명료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방울이 톡 터지듯 고요가 깨졌다. 연우는 놀라 뒤를 돌았다. 반쯤 열린 문가에 윤 교수가 서 있었다.

강단에 설 때 입는 갑옷 같은 정장이 아니었다. 깃 없는 흰 셔츠에 짙은 네이비색 와이드 팬츠,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가죽 로퍼. 손목에는 번쩍거리는 예물 시계 대신 밴드를 교체한 스마트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서른 중반. '여성 최초',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런 수식어가 촌스럽다는 듯 무심하게 구는 사람. 그녀는 권위보다는 감각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아, 교수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는 무슨. 내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했지? 연우 씨."

윤 교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세련된 시트러스와 우디가 섞인 묘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방금까지 공간을 채우던 땀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도시적이고 날 선 향이었다. 공기의 질감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연우가 닦고 있던 몬스테라 잎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다들 어디 갔어? 또 우르르 몰려나갔나 보네."

"네, 잠시 휴게실에..."

"잘됐네. 안 그래도 여기 공기 탁해서 들어오기 싫었는데. 들어오자마자 칙칙한 냄새가 진동을 하잖아."

윤 교수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과장되게 손부채질을 했다. 그 동작이 마치 연우와 자신 사이의 공기만을 따로 걸러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캐리어에서 커피 한 잔을 꺼내 연우에게 쑥 내밀었다.

"마셔. 아까 1층 카페 갔다가 연우 씨 생각나서 샀어. 여기 다른 사람들은 줘봤자 커피 맛도 모르는데, 아깝잖아."

컵 표면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연우의 손가락을 적셨다. 연우는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연우 씨 생각나서 샀어. 그 별거 아닌 말이 메말라 있던 가슴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그나저나 연우 씨는 여기 있기 좀 아깝다."

"네?"

"이렇게 결이 고운 사람이 저런 둔한 사람들이랑 섞여 있으려니 힘들지 않냐고. 난 딱 보면 알겠던데. 연우 씨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그녀는 연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례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너는 그들과 다르다'는 인정, 그리고 '나만이 너를 알아본다'는 은밀한 신호였다. 연우의 가슴 속에 묘한 안도감이 퍼졌다. 그래,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

"내 방 가서 책상 정리 좀 도와줄래요? 내가 이번에 프로젝트 때문에 자료를 잔뜩 벌려놨더니, 도저히 감당이 안 되네. 연우 씨 말고는 아무도 손 못 대게 하고 있거든."

그것은 도움 요청이었지만, 동시에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의 초대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따라오라는 명확한 지시였음에도, 연우에게는 그 말이 명령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의 특권처럼 들렸다. 이 숨 막히는 회색 건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밀폐된 공간은 윤 교수의 향수 냄새로 가득 찼다. 층수가 바뀔 때마다 귀가 먹먹해졌다. 그녀는 주차된 흰색 포르쉐 앞에서 차 문을 열며, 마치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아, 맞다. 연우 씨. 정리는 나중에 하고 드라이브나 할까? 날씨가 너무 아깝잖아."

연우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는 운전석에 올랐다. '정리를 도와달라'는 말은 처음부터 그를 밖으로 불러내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연우는 차가 학교 정문을 빠져나갈 때쯤에야 깨달았다. 조수석 가죽 시트는 몸을 부드럽게 감쌌고, 차 안은 소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마치 무성 영화처럼 멀게 느껴졌다. 연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사소한 거짓말이 자신을 향한 교수의 각별한 관심처럼 느껴져 묘한 우월감을 주었다.

도착한 곳은 한남동의 갤러리였다. 평일 오후의 갤러리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높은 천장과 하얀 벽, 그리고 적당히 서늘한 공기. 그곳은 학교 연구실의 메마른 건조함과는 다른, 세심하게 관리된 쾌적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윤 교수는 익숙한 듯 큐레이터와 눈인사를 나누고 안쪽 전시실로 향했다. 연우는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그림을 설명하려 들거나 지식을 뽐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 침묵이 연우에게는 편안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가성비'나 '효율', 혹은 '남자의 기세' 따위를 묻지 않았다.

"이 작가, 선이 참 과감하지 않아?“

윤 교수가 멈춰 선 곳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거칠게 뒤엉킨 대형 추상화 앞이었다. 캔버스 위에는 질서 없이 그어진 선들이 서로를 할퀴듯, 혹은 끌어안듯 얽혀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상처 같았고, 멀리서 보면 춤 같았다.

"네... 불안해 보이는데,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감상을 내뱉었다. 윤 교수가 고개를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림에서 연우의 옆얼굴로,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으로 옮겨갔다.

"보통은 난해하다거나, 얼마짜리냐고 묻던데."

"......"

"연우 씨는 본질을 보네. 계산하지 않고."

그녀가 몸을 돌려 연우와 마주 섰다. 갤러리의 조명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는 노골적인 욕망 대신, 세련된 호기심과 호의가 담겨 있었다. 연우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난 그런 사람이 좋아. 영감을 주거든."

영감(Inspiration). 그 단어가 공기 중에 툭 떨어졌다. 유리구슬이 바닥에 부딪히는 것처럼 청명하고, 동시에 위태로운 소리였다.

"예술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나한테 자극을 주고 영감을 주는 대상에게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미묘하게 좁혀진 거리감. 그녀의 재킷에서 나는 우디 향이 연우의 호흡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연우의 셔츠 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깃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어내듯 손을 뻗었다 거두었다.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나도 그만큼의 투자를 아끼지 않아. 그게 합리적인 거니까. 안 그래?"

그녀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투자'와 '합리'. 갤러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제학 용어들이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하니 마치 우아한 약속처럼 들렸다. 연우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영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돌려받기를 원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연우는 자신이 그녀에게 단순한 조교 이상의, '특별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자. 보여주고 싶은 게 더 있어."

윤 교수가 다시 앞장섰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가 텅 빈 전시실에 메아리쳤다. 연우는 그 소리가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른 채, 그림 같은 그 뒷모습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림 속 붉은 선들이 그들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엉켜들고 있었다.

그날 이후, 연우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연구실의 공기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연우는 더 이상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비상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윤 교수의 연구실, 혹은 그녀의 조수석.

"연우 씨, 오늘 저녁에 뭐 해? 나랑 와인이나 한잔할까?"

호출은 불규칙했다. 때로는 논문 지도를 핑계로, 때로는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연우를 불러냈다. 청담동의 오마카세, 한남동의 위스키 바, 성수동의 팝업 스토어. 그녀가 데려가는 곳들은 연우의 대학원생 월급으로는 엄두도 못 낼 장소들이었다. 처음에는 계산할 때마다 불편해서 지갑을 만지작거렸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촌스럽게 왜 이래?"라며 제지했다.

"내가 좋아서 쓰는 거야. 연우 씨는 그냥 즐겨. 내 취향을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밥값 하는 거니까."

그 말이 주는 묘한 안도감. 연우는 점차 그녀의 호의에 익숙해져 갔다. 그녀는 연우에게 넥타이를 선물하거나, 읽던 책을 건네주며 밑줄 친 문장을 공유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지원을 넘어선, 정신적인 교류처럼 느껴졌다. 영훈을 비롯한 선배들은 수군거렸다.

"야, 이연우. 너 요즘 교수님이랑 뭐 있냐? 맨날 불려 다니네?"

"그냥 프로젝트 보조하는 겁니다."

"보조? 야, 보조를 미슐랭 식당에서 하냐? 교수님이 너 아주 끼고 도시더라. 부럽다, 새끼야. 라인 잘 탔네."

그들의 비아냥거림조차 이제는 칭찬처럼 들렸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그녀와 말이 통한다. 연우는 그 우월감을 먹고 자랐다. 그녀가 만들어준 투명한 온실 속에서, 연우는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온실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녀는 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연스럽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연우 씨, 그 셔츠 색깔 좀 별로다. 내가 사준 거 입고 다니지 그래?"

"아, 오늘은 세탁 중이라..."

"다음엔 꼭 입고 와. 그게 연우 씨 피부 톤에 훨씬 잘 어울려. 내 말 들어, 손해 안 보니까."

그녀는 연우의 옷차림부터 말투, 심지어 주말 스케줄까지 간섭했다. 그것은 지시가 아니라 '세련된 조언'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에 거부하기 힘들었다. 연우는 그녀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신을 조금씩 깎아내고 다듬었다. 그것이 '파트너'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제주도 학회 일정이 잡힌 것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번 학회, 연우 씨도 같이 가자."

"제가 가도 될까요? 박사 과정 선배들도 있는데..."

"그 칙칙한 놈들을 데려가서 뭐 해? 분위기만 망치지. 가서 내 발표도 좀 돕고, 끝나면 바람이나 쐬자고. 거기 호텔 수영장이 그렇게 좋다던데."

윤 교수는 마치 여행 계획을 짜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비행기 표랑 숙소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연우 씨는 몸만 와."

연우는 달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회라는 공적인 명분 뒤에 숨겨진, 사적인 휴가의 뉘앙스. 지난 몇 달간 그녀와 쌓아온 신뢰, 그리고 수많은 저녁 식사와 대화들이 그를 안심시켰다. 별일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아하고 지적인 시간들이 이어질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온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듯, 자신이 이미 그녀의 식탁 위에 올려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학회는 제주도의 신축 부티크 호텔에서 열렸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자본과 윤리'라는 거창한 주제로 열린 이번 세션에서 윤 교수는 단연 돋보이는 발표자였다. 그녀가 연단에서 내려올 때 쏟아진 박수 소리는 호텔 로비를 가득 메운 파도 소리처럼 웅장했다. 연우는 무대 아래 그림자 속에 서서 노트북으로 녹취를 하며, 저 빛나는 사람의 '파트너'라는 사실에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공식 일정이 끝난 뒤의 리셉션장은 북새통이었다. 학계의 원로들과 기업 임원들이 윤 교수 주위에 몰려들었다. 연우는 그 옆에서 명함을 대신 받거나, 그녀의 빈 샴페인 잔을 새것으로 교체하며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이 친구가 내 오른쪽 날개야. 센스 있지, 입 무겁지.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진국이라니까."

윤 교수가 연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소개했다.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 연우에게 꽂혔다. 연우는 수줍게 목례를 했다. 샴페인 두 잔에 취기가 기분 좋게 올랐다. 이 화려하고 지적인 세계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윤 교수가 사람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와 연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밑에 피로가 얇게 번져 있었다.

"아, 기 빨려. 저 꼰대들 상대하기 진짜 지치네."

"피곤해 보이십니다. 먼저 올라가시겠습니까?"

"그래야겠어. 아, 맞다. 연우 씨."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내일 오전 발표 자료 최종본 들어있는 USB, 내 방에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그것만 좀 체크해 줄래? 내가 지금 눈이 너무 뻑뻑해서 글씨가 안 들어오네. 그거 보고 간단히 룸서비스나 시켜 먹자. 고생했잖아."

업무의 연장선이자, 수고에 대한 포상. 거절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고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윤 교수는 구두를 벗을 듯이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댔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을 압도하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연우 앞에서만 보여주는 무장 해제된 모습이었다.

"역시 연우 씨랑 있어야 숨통이 트이네."

그 말이 좁은 승강기 안을 맴돌았다. 연우는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스위트룸의 공기는 서늘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밤바다가 검게 넘실거렸다. 윤 교수는 들어오자마자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두었다.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편하게 있어. 노트북 켜고."

그녀가 욕실로 사라지자, 연우는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고 파일을 열었다. 엑셀 시트의 차가운 숫자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는 익숙한 업무 모드로 돌아가 오타를 수정하고 그래프를 점검했다. 타닥, 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을 채웠다. 그것은 그에게 익숙한 안전장치였다. 욕실 쪽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연우는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가, 다시 조여 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고 윤 교수가 나왔다.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과 그녀 특유의 우디 향수가 섞인 냄새가 났다. 방금 씻고 나온 사람에게서 풍기는 습하고 더운 기운이 서늘했던 거실 공기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그녀는 미니바에서 위스키 병과 얼음통을 꺼내 들고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도 해? 대충 해도 완벽하던데 뭐. 이제 그만하고 이리 와."

그녀가 잔에 얼음을 채웠다. 달그락.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연우는 노트북을 덮어야 할지, 계속하는 척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화면을 내렸다. 검은 화면에 자신의 긴장한 얼굴이 비쳤다.

"한잔해. 긴장 풀고."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스쳤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연우는 엉거주춤하게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업무 모드'는 사라지고, 점도가 높은 침묵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연우는 이 공기가 언제부터 무거워졌는지 복기해 보려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니면 그녀가 가운을 입고 나왔을 때부터?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방 안은 고요했다. 지금 "다 마셨으니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일어서는 상상을 해보았다. 왠지 그것은 분위기를 깨는, 아주 촌스럽고 예의 없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윤 교수는 말없이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연우의 셔츠 깃과 넥타이, 그리고 긴장해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훑었다. 평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소유물을 확인하는 주인처럼 느긋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연우 씨는 꿈이 뭐야? 계속 공부하고 싶어?"

"네, 기회만 된다면... 교수님처럼 좋은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좋은 연구자라... 그렇지. 근데 연우 씨, 이 바닥이 연구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가운의 깃이 살짝 벌어졌다. 연우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위스키 잔 속의 녹아가는 얼음만 내려다보았다. 얼음이 녹으며 투명한 물이 위스키와 섞이고 있었다.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힘들었어. 여자가 무슨 경제학이냐, 시집이나 가라... 그런 시선들 사이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쉬웠겠어? 실력만으로는 안 돼. 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

"존경합니다, 교수님. 진심입니다."

연우가 간신히 대답했다. 윤 교수가 피식 웃었다.

"존경이라... 난 그런 말보다, 진짜 내 편이 필요해. 말뿐인 존경 말고, 진짜로 통하는 사람. 내 짐을 나눠 질 수 있는 파트너."

윤 교수가 손을 뻗어 연우의 손등을 덮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감촉이 피부에 닿자, 연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힘을 주어 눌렀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의 악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손길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의 압력이 담겨 있었다.

"교수님, 저... 제가 좀 취한 것 같습니다. 이만..."

"취하면 어때? 우리 다 컸잖아. 쿨하게 굴어."

그녀는 연우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로 가져갔다. 가운 너머로 체온이 느껴졌다. 연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호의인가, 틈을 보이는 것인가.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켜졌지만, 몸은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연우에게 밥을 사고, 기회를 주고, '특별한 이해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모든 호의들이 사실은 선불금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청구서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연우는 깨달았다. 연우가 입술을 달싹이며 거절의 말을 찾고 있을 때, 윤 교수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응시했다. 눈동자에 조소가 스쳤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촌스럽게. 남자가 이럴 때 빼는 거 아니야."

그녀가 남은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유리잔 바닥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쿵. 마치 판사의 의사봉 소리처럼.

"연우 씨...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거,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기회를 주면 잡아야지. 우린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야.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지."

그 말이 연우의 사고 회로를 정지시켰다. 폭력적인 협박은 없었다. 다만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인 것처럼 포장된, 거절할 수 없는 독촉장이 날아왔을 뿐이었다. 지금 이 손을 뿌리치고 나가면, 그는 '합리적인 거래'를 거부한 어리석은 낙오자가 된다. 그리고 내일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싸늘하게 변해 있을 그녀의 눈빛을 감당해야 한다. 아니, 학계에서 매장당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자신의 미래 따위는 휴지 조각이 될 테니까. 연우는 그 무게를 가늠하느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성이 충돌하며 그를 마비시켰다. 윤 교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이 연우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긴장 풀고 즐겨. 이것도 다 배우는 과정이니까."

연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밖에서 파도 소리가 유리창을 때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무력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연우는 세면대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놓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거친 손길에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비누 거품이 눈에 들어가 따가웠다. 차라리 그 통증이 반가웠다.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하게 명징한,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감각이었으니까.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욕실 거울에 자욱하게 김이 서려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아냈다. 물기 어린 유리 너머로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 그리고 겁에 질려 파랗게 질린 입술. 그는 그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윤 교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욕실 타일에 튕겨 울렸다. 연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물기가 닦인 거울 속의 남자가 입을 달싹였다.

"그래, 별거 아니야. 다들 이렇게 살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쇳소리가 섞인, 비겁한 목소리였다. 그는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보았다. 아까 윤 교수 앞에서 지었던, 그 '합리적이고 쿨한' 미소를 흉내 내보려 했다. 하지만 안면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울고 있는 것도, 웃고 있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거야. 강요당한 게 아니라고. 기회를 잡은 것뿐이야. 그게... 합리적인 거니까."

그는 경제학 원론에서 배웠던 용어들을 주문처럼 웅얼거렸다. 비용과 편익. 투자와 회수. 그는 필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거래'로 규정하려 애썼다. 거래라면 대등한 것이다. 거래라면 자신이 비참해질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 무언가를 지불한 '야심가'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구역질 나는 패배감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윤 교수의 손이 닿았던 어깨와 허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녀의 우디 향수 냄새가 비누 향을 뚫고 콧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비누를 집어 들었다. 거품을 내어 손등을, 팔뚝을, 목덜미를 벗겨낼 듯이 문질렀다. 피부가 벗겨질 듯 쓰라렸지만, 몸에 배인 그녀의 타액 같은 끈적함은 씻겨나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그때 분위기가 원래 그랬나?

혹시 나도 모르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자신이 거절하지 못했던 찰나의 순간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반복 재생되었다.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나? 아니, 애초에 방으로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갤러리에서 웃어주지 말았어야 했나? 죄책감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세면대 물속에 처박았다. 차가운 물이 귀와 코를 막았다. 웅― 하는 이명 소리와 함께 질문들이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는 숨이 막혀올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속에서 눈을 뜨자, 흔들리는 타일 바닥이 보였다. 마치 자신의 무너진 세계처럼.

서울로 돌아온 연구실은 여전히 건조했다. 제주도의 습한 바닷바람은 꿈이었던 것처럼, 상경관 402호는 바짝 마른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변한 것은 없었다. 오직 연우의 감각만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는 '조건반사'에 걸린 실험실 쥐가 된 것 같았다.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윤 교수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리면,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점심시간, 연우는 영훈을 비롯한 동료들과 학식당 구석 자리에 앉았다. 쇠로 된 식판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변 학생들의 말소리, 식기 세척기가 돌아가는 소음이 뒤섞여 웅웅거렸다.

"야, 이번 학회 진짜 대박이었어. 윤 교수님 발표 끝나고 사람들 몰려드는 거 봤냐? 내가 다 어깨가 으쓱하더라."

영훈이 붉은 제육볶음을 밥 위에 얹으며 흥분해서 말했다. 입가에 묻은 붉은 양념이 번들거렸다. 다른 후배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진짜 포스 장난 아니시죠. 저번 달에 경제지 인터뷰하신 것도 봤는데, 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던데요. '자본주의는 차가운 게 아니라, 공정한 것이다.' 그거 보고 진짜 소름 돋았잖아요.“

"그러니까. 실력 있지, 외모 되지, 마인드 쿨하지. 우리 학과의 자랑 아니냐, 진짜. 이번에 대형 국책 과제 따온 것도 다 윤 교수님 덕분이잖아.“

우리 학과의 자랑. 공정함. 쿨한 마인드. 그 단어들이 연우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연우는 밥알을 세듯 깨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런데... 교수님 스타일이, 좀 과하다고 느낄 때는 없으세요?"

식판을 긁던 영훈의 숟가락이 멈췄다.

"과해? 뭐가?"

영훈이 연우를 쳐다봤다. 거기엔 어떤 적의도 없었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순수한 의문만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 투명한 무지가 연우를 더 질식하게 만들었다.

"아니, 뭐랄까. 공사 구분이 좀 모호하다거나... 사람을 좀, 도구적으로 대하신다거나..."

연우의 말끝이 흐려졌다. 식탁 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영훈이 피식 웃으며 물을 마셨다. 물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탁, 하고 울렸다.

"야, 이연우. 너 배부른 소리 한다? 교수님이 너 얼마나 챙기시는데. 이번에도 제주도 데려가시고, 따로 밥도 사주신다며. 우리 학과에서 너만큼 혜택받는 놈이 누가 있냐?"

"......"

"원래 능력 있는 분들은 스타일이 좀 세. 자기 확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그걸 소화해 내는 게 우리 능력이지, 안 그러냐? 야, 딴 방 가봐라. 논문 뺏기고 인건비 떼이는데 수두룩해. 윤 교수님만큼 합리적이고 깨어있는 분이 어디 있어?"

영훈의 말에 후배들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의는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윤 교수가 '가장 이상적인 리더'이자 '닮고 싶은 롤모델', 그리고 자신들의 밥줄을 책임지는 '구원자'일 뿐이었다. 그 거대한 '합의된 믿음' 앞에서 연우의 고통은 그저 '예민함'이나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되었다.

"너 교수님이 너만 예뻐하니까 괜히 어리광부리는 거 아니냐? 부러운 새끼. 나도 교수님이랑 드라이브나 좀 해봤으면 좋겠다."

영훈이 농담조로 연우의 어깨를 툭 쳤다. 연우는 따라 웃지 못했다. 입꼬리가 떨렸다. 그들의 존경과 선망이, 연우를 가두는 가장 단단한 감옥이었다. 여기서 윤 교수의 '진짜 얼굴'을 이야기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네가 예민하다", "끼 부린 거 아니냐"는 핀잔뿐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배신자로 몰아갈지도 몰랐다. 연우는 입안에 든 식은 밥을 억지로 삼켰다.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식당의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아무도 그 닫힌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연우 씨, 이거 부탁해.“

윤 교수가 투명한 L자 파일철 하나를 연우의 책상 위에 툭 던졌다. 플라스틱이 나무 책상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경쾌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방금 들어온 듯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채였고, 한 손에는 얼음이 다 녹아가는 테이크아웃 커피가 들려 있었다.

"이번 학회 정산 서류야. 영수증은 내가 대충 챙겨놨는데, 연우 씨가 꼼꼼하니까 한번 더 확인해 줘. 빠진 거 있으면 채워 넣고."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활기찼다. 그녀에게 지난밤 호텔 방에서의 일은 어떤 부채감이나 어색함을 남기지 않은 듯했다. 그저 성공적인 프로젝트 뒤에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나, 혹은 기분 좋게 끝난 '뒤풀이' 정도로 처리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시간은 연우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연우는 파일철을 집어 들었다. 종이 몇 장의 무게일 뿐인데, 납덩이처럼 묵직했다. 그 무게가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짓눌렀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윤 교수가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연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그리고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윤 교수가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연우의 이마를 짚으려 뻗어왔다. 손톱에 발린 붉은 매니큐어가 연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끼익, 소리를 냈다. 허공에 멈춘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리다 자연스럽게 거두어졌다.

"피곤한가 보네. 이거 하고 일찍 들어가. 내일은 좀 늦게 나와도 되니까."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쿨하게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구실의 공기를 예리하게 갈랐다. 그 소리에 연우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철을 펼쳤다. 얇은 감열지 영수증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호텔 라운지, 룸서비스, 와인 바... 날짜와 시간, 금액이 선명하게 찍힌 그 종이 조각들은 그날의 기억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었다.

02:30 AM. 룸서비스.

그 숫자가 연우의 눈을 찔렀다. 하지만 이 종이들은 곧 '학회 운영비'나 '회의비'라는 이름으로 세탁되어 서류 속에 편철될 것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자본의 논리 안에서, 그날의 폭력은 '업무 비용'으로 치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의 시선이 모니터 옆으로 옮겨갔다. 그곳에 화분이 있었다. 그가 매일같이 잎을 닦고 분무기로 물을 주었던 몬스테라. 하지만 며칠간 제주도에 다녀오는 동안, 누구도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잎사귀 끝이 누렇게 타들어가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흙은 바짝 말라 화분 가장자리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어제 줬어야 했는데.'

연우는 생각했다. 아니, 제주도 가기 전날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것 같다. '내일 주면 되지' 내지는 '갔다 와서 주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사소한 방치들이 쌓여, 결국 생명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화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습관처럼 분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물을 준다고 해서, 이미 타버린 잎이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올 리 없었다. 갑자기 뜨거운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화분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흙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소리에 놀란 윤 교수가 뛰쳐나오고, 복도에 있던 영훈이 욕을 하며 달려오는, 그런 엉망진창인 파국을 상상했다. 소리를 지르고, 울고, 이 건조한 공간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연우는 화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탁. 둔탁하고 작은 소리만이 났을 뿐이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화분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파국을 일으킬 힘조차, 아니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을 방치하고 죽인 것은, 결국 자신이었으니까. 그는 영수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룸서비스: 위스키 1병, 과일 안주.’ 그는 딱풀 뚜껑을 열었다.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영수증 뒷면에 꼼꼼하게 풀칠을 하여 지출결의서 한가운데에 붙였다. 꾹, 꾹.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눌렀다.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아주 반듯하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무리였다.

학교 정문 앞 편의점 파라솔은 낡아서 한쪽 다리가 기울어져 있었다. 연우는 흔들리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듬뿍 햄치즈 샌드위치'. 이름과 달리 빵 사이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햄 한 조각과, 말라붙어 색이 바랜 치즈가 메롱하듯 혀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한입 베어 물었다. 차갑고 퍼석한 식빵이 입안의 수분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마요네즈에서는 시큼한 맛 대신 먼지 맛이 났다. 그는 억지로 씹어 삼켰다. 목이 꽉 막혀왔지만 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거친 덩어리의 감각을 느꼈다.

등 뒤로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상경관 건물이 거대한 성채처럼 솟아 있었다. 이제 다시는 저곳에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다. 자퇴서는 학사지원팀 데스크 위에 올려두고 왔다. 사유란에는 '일신상의 이유'라고 적었다. 그 다섯 글자 안에 담기지 못한 수만 가지의 말들—수치심, 모멸감, 자기혐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샌드위치와 함께 꿀꺽 삼켰다. 건너편 빌딩 옥외 전광판이 번쩍였다. 뉴스 채널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윤 교수였다. 그녀는 세련된 흰색 재킷을 입고, '차세대 경제 리더'라는 자막 위에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인터뷰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기회비용'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하고, 취할 건 확실히 취하는 태도. 그게 가장 합리적인 생존 방식이죠.”

그녀가 웃었다. 화면 속의 그녀는 완벽했다. 흠집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단단해 보였다. 그녀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고, 그녀의 세계에는 오점인 '이연우'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연우는 씹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전광판을 응시했다. 분노는 치밀지 않았다.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연극이 끝난 텅 빈 무대 객석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명은 꺼졌고, 배우들은 떠났는데, 자신만 퇴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관객처럼. 세상은 저토록 빠르게 돌아가는데, 자신만이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손등으로 무심하게 털어냈다. 부스러기들이 보도블록 틈새로 흩어졌다. 개미 한 마리가 부스러기를 물고 어디론가 바쁘게 기어갔다. 그는 남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기계적으로 깜빡거렸다. 붉은색, 파란색, 다시 붉은색. 그 불빛이 연우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번갈아 드리워졌다.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설명되지 않는 침묵만이 그의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고 얇게 늘어졌다.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실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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