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민 단편 - 3
밤이 오면 나는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다. 오래된 알루미늄 샤시가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영하의 냉기가 방충망을 뚫고 들이닥쳤다. 방 안의 훈기가 순식간에 빨려 나갔지만 나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창틀 끝, 낡아서 틈이 벌어진 방충망 너머로 희뿌연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온 눈발인지, 누군가의 입김인지, 아니면 담배 연기인지 알 수 없는 회색 기체였다. 매캐한 멘솔 냄새가 차가운 공기에 섞여 올라왔다. 낮 동안 내가 가구 조립 설명서 도면 위에 그어 둔, 감정 없이 딱 떨어지는 검은 잉크 냄새 위로 그 비릿한 향이 덧입혀졌다. 그쯤이면 대개 시계는 밤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내 아래층에 살았다. 정확히는 계단을 반 층 더 내려가야 닿는 반지하. 겨울이 가장 먼저 고이는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천장 모서리에 걸린 보안등 불빛이 그의 방을 희미하게 건드렸고, 가끔 얼음 깨지는 소리나 문제집을 털썩 넘기는 소리가 둔탁하게 위로 올라왔다. 건조한 겨울 공기 탓에 소리는 평소보다 날카롭게,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도착한 뒤에도 소리는 얼어붙은 것처럼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라이터는 늘 거기 있었다. 창틀의 가장자리, 눈이 들이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은색 금속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놓여 있었다. 누가 먼저 올려두었는지는 묻지 않았고, 며칠씩 보이지 않아도 찾지 않았다. 그것은 약속이라기보다 계절적인 현상에 가까웠다.
나는 하던 일을 멈췄다. 두꺼운 후리스 점퍼를 걸치고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이 동작들 사이에 생각이나 판단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현관문을 닫고 짧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공동 현관문을 밀자 복도에 갇혀 있던 냉기가 발목을 할퀴었다. 건물 뒤편, 보안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그가 있었다. 외벽에 등을 기댄 채, 롱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웅크린 모습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외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세상의 가장자리 같은 그곳에서 하얀 입김과 담배 끝의 붉은 불빛만이 번갈아 깜빡였다. 나는 말없이 그 옆에 섰다. 패딩 소매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시멘트 벽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 라이터를 켰다. 짧은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 불에 담배를 대었다.
연기는 위와 아래를 구분하지 않고 허공에서 섞였다. 내 입에서 나온 하얀 김과 그의 입에서 나온 회색 연기가 엉켰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체온이 섞인 숨이 잠깐 같은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벽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 추위에 말려 올라간 금연 스티커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 밤들이었다. 말은 없었고, 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조금씩, 얼어붙은 서로의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다시 연기가 올라왔을 때, 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냄새가 신호였고 몸이 반응했다. 창문을 열면 라이터가 있었고, 불을 붙이고 내려다보면 그가 있었다. 같은 자리, 같은 각도. 달라진 것은 손의 속도뿐이었다. 추위 때문에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넣는 속도가 조금 다급해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실내로 들어왔다. 누구의 방인지,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영하의 추위를 피하는 것이 더 시급한 짐승들처럼 서둘러 현관턱을 넘었다. 연기가 사라지면 다음 순서가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주방 불이 켜졌고, 냄비에 물이 올려졌다. 라면 봉지는 당연한 듯 두 개가 뜯겨졌다. 그 선택을 바꾸는 일은 한 번도 고려된 적 없었다. 그는 식탁 왼쪽에, 나는 반대편에 앉았다. 의자의 위치는 조립 설명서의 도면처럼 오차 없이 고정되어 있었고, 그 배치는 수정이나 개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라면이 끓는 동안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렸고, 좁은 방 안의 유리창에는 뽀얗게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의 밤은 성에에 갇혀 흐릿했다. 마주 보지 않고 앉아 있는 일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사이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안경알에 자꾸만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는 묵묵히 면을 삼켰다. 대부분의 관계는 명확한 언어가 없어도 제 기능을 수행했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얼었던 몸을 데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식사 내내 허공을 응시하거나 식탁 구석에 밀어둔 토익 책 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나는 국물 위에 뜬 기름기만 내려다보았다. 대화는 없었다. 다만 스마트폰 화면에서 새어 나온 차가운 전자 빛이 내 안경알에 잠깐씩 걸렸다 사라질 뿐이었다. 물을 따르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두 개 꺼내려다 멈췄다. 싱크대 위에 깨끗한 컵이 하나뿐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물때가 남아 있었다. 컵에 물을 채워 식탁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는 말없이 그 컵을 집어 들었다가, 반쯤 남긴 채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그대로 그 컵을 들었다. 입 닿은 자리가 아직 식지 않았다. 김치 통은 하나였다. 내 젓가락이 닿았던 붉은 자리에 그의 젓가락이 망설임 없이 이어졌다.
설거지를 할 때 나는 수세미를, 그는 마른 행주를 들었다. 좁은 싱크대 앞에서 어깨가 닿았다. 니트와 니트가 스치자 타닥, 푸른 정전기가 튀었다.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따끔거리는 전류를 신호음처럼 즐겼다. 젖은 내 손등 위로 그의 마른 손가락이 겹쳐졌다. 그는 내 손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듯 천천히, 꼼꼼하게 손가락 마디를 감싸 쥐었다. 피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그 정도의 접촉은 스킨십으로 분류되기 보다는 오래된 습관에 가까웠다. 우리는 물기를 닦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지지 않았고, 서로의 표정을 피하지도 않았다. 침대 위에서의 일은 서로의 몸을 연료 삼아 혹한을 견디는 가장 원초적인 난방 방식이었다. 중력이 작용하듯, 우리는 무거운 옷을 벗고 서로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무거운 것이 아래로 가라앉듯 몸이 엉켰다. 나는 얼음장 같은 두 손을 망설임 없이 그의 티셔츠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서늘한 손바닥이 맨 등판에 닿자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몸을 물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짐승처럼 꽉 끌어안아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었다. 살이 닿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경계가 흐릿해졌다. 낮 동안 내가 도면 위에 그었던 명확한 선들은 이 이불 속에서 모두 뭉개졌다. 낡은 매트리스가 삐걱거렸지만, 그 소리는 보일러 소리에, 혹은 서로의 귓가에 젖어드는 숨소리에 묻혔다. 일이 끝나고 나면 정적이 밀려왔다. 그는 바로 몸을 떼어내지 않았다. 가쁜 숨이 잦아들 때까지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나 역시 그를 밀어내지 않고 땀에 젖은 그의 뒷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 동작들에는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오래 반복될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일으켰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온에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방금까지 섞였던 온기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롱패딩을 집어 들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 나는 춥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늘 같은 데시벨이었다. 그가 내려가고 나면 식탁 위에는 다시 차가워진 공기와 물기 남은 컵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그것을 바로 치우지 않았다. 치우지 않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감각은 끝내 생기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남아 있는 상태가 하나의 낡은 가구처럼 눈에 익어 갔다.
그 이후로도 밤은 같은 속도로 왔다. 창틀 위로 희뿌연 입김이 피어오르는 날이 있었고, 너무 추워서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조립 설명서의 불량 데이터처럼 기록할 가치가 없는 오차 범위 내의 일들이었다. 입김이 없는 밤에는 창문을 열지 않았다. 열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다. 가구 부품의 나사 구멍을 좀 더 정교하게 그리거나, 끓인 물을 다시 식히거나, 아무 데도 쓰이지 않을 보조선을 도면 위에 몇 개 더 그었다. 밤은 그런 무용한, 그러나 정확해야만 하는 일들로도 충분히 채워졌다.
며칠 뒤, 다시 연기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냄새가 옅었다. 담배를 바꾼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너무 세서 냄새가 흩어진 것인지 굳이 분석하지 않으려 했다. 창문을 열면 라이터는 얼음처럼 차갑게 그 자리에 있었고, 불을 붙여 내려다보면 그가 있었다. 다만 그날, 그는 벽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서 있었다. 등을 기대지 않고 서 있는 자세가 미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혹한의 날씨 탓에 발을 구르는 것일 수도, 아니면 다가오는 졸업 시즌의 불안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자세 하나쯤은 계절처럼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도 겉옷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가 그의 옆에 섰다. 그날 밤, 라이터는 한 번에 붙지 않았다. 부싯돌을 두 번, 세 번 튕겨야 했다. 불꽃이 붙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짧은 지연을 문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오차는 겨울에 흔했다.
어느 날은 그가 먼저 내 집에 와 있었다. 문을 열면 불이 켜져 있었고,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롱패딩을 벗고 들어가는 내 동작이 이미 그 공간의 매뉴얼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떤 날은 라면이었고, 어떤 날은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전자레인지의 띵, 하는 단조로운 신호음이 울리면 우리는 기계 장치의 부품처럼 조건반사적으로 각자의 접시를 꺼냈다. 두 개를 꺼내는 일은 여전했지만, 국물을 남기는 쪽은 그날그날 달랐다.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습관처럼 책을 펼쳤다. 전공 서적이 아니라 NCS라고 적힌 두꺼운 수험서였다. 책의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나는 그 페이지가 어디까지 넘어갔는지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종이를 보고 있었지만, 내 태블릿 펜이 움직이는 소리와 그가 샤프를 딸깍거리는 소음은 비슷한 박자로 겹쳐졌다. 펜이 종이를 긁는 건조한 소리는 이제 라면 국물 끓는 소리만큼이나 배경음에 가까웠다. 늦은 밤, 그가 졸린 눈으로 소파에 앉아 있을 때면 나는 극세사 담요를 하나 더 꺼냈다. 덮어주지는 않았고, 그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무심하게 툭 던져두었다. 그는 늘 그 담요를 집어 들어 어깨에 둘렀다. 외풍을 막기 위한 그 행위가 반복되면서 담요는 소파 옆에 붙박이처럼 놓이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몸살감기에 걸렸을 때, 식탁 위에 종합감기약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약을 사 왔다는 생색을 내지 않았고, 나 역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빈 약통은 다음 날이면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증거를 인멸하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더 묻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 집에 칫솔을 두고 가지 않았다. 대신, 욕실에서 내 칫솔 옆에 서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 그는 젖은 칫솔을 탈탈 털어 물기를 뺀 뒤, 다시 자신의 패딩 주머니나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침마다 같은 컵을 사용했지만, 나는 그 컵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는, 아니 겨울을 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의 패딩은 늘 현관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눈과 비가 섞인 물기를 털지 않아 축 늘어진 채였다. 나는 그 옷이 마를 때까지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 다른 옷을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손잡이는 이미 그 검은 패딩을 위해 설계된 공간처럼 보였다. 패딩 끝에서 녹아내린 잿빛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그 지저분한 물자국만이 그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유일한 영역 표시였다.
섹스가 없는 날도 늘어갔다. 피곤하거나, 면접 준비로 예민하거나, 그저 자연스럽게 건너뛰어졌다. 그런 날에도 우리는 같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등이 닿거나 닿지 않거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불 밖의 온도가 영하라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심박수가 같은 리듬으로 느려진다는 사실이었다. 몸이 닿지 않아도 자리는 비좁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가 먼저 잠들었다. 스탠드 불을 끄지 않은 채였다. 나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형광등이 켜진 방은 어둠 속보다 조금 더 작고, 적나라하게 초라해 보였다. 그의 숨소리가 일정해진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지 않았다. 잠들면 이 온기가 꿈처럼 사라질까 봐, 차라리 깨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 무렵부터 우리 사이의 무게 중심이 조금 어긋나기 시작했다. 2월의 대학가는 텅 빈 껍질처럼 보였다. 강의가 끝난 건물 앞에는 버려진 책상과 매트리스가 쌓였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이삿짐 트럭이 골목을 막아섰다.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는 얼굴들이 차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흐름에서 특별히 예외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그가 사는 반지하를 하나의 주소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은 오래 머무는 집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끝내기 위해 잠시 몸을 얹어두는 장소에 가까웠다. 목적이 사라지면 기능도 함께 소멸하는 종류의 공간. 겨울을 버티는 동안만 필요했다가, 계절이 바뀌면 접혀야 하는 구조물 같은 것.
“이제 학교 갈 일이 없어서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하나 줄어들었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였다. 기능을 다한 공간에 사람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건,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에 가까웠다. 설계 수명이 끝난 부품을 계속 사용하는 일만큼 비효율적인 것도 없으니까.
밤이 다시 오면 모든 것이 리셋된 것처럼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연기, 라이터, 식탁, 의자. 바뀐 것은 거의 없었고, 바뀌지 않은 것들은 배경에 묻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1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는 일이 이 얇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침묵이었다. 그저 그렇게 하루가 각자의 집에서, 그러나 거의 같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될 뿐이었다. 어느 날, 달력이 한 장 넘어가 있었다. 내가 넘긴 기억은 없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밤이었고, 아침도 비슷한 순서로 시작됐을 텐데 날짜만 바뀌어 있었다. 붉은색 일요일이 지나고 검은 숫자들이 빼곡한 평일의 한가운데였다.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잠깐 바라보았다. 건조한 공기 탓인지 종이 끝이 조금 말려 있었다. 그가 넘겼을까. 아니면 웃풍이 넘겼을까.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았다. 달력이 넘어갔다는 건 겨울이 끝나간다는 뜻이고, 계절이 바뀐다는 건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저녁 8시. 그가 왔다. 여느 때처럼 식탁 왼편에 앉은 그는 가방에서 습관처럼 책을 꺼냈다. 탁. 유리에 책이 닿는 파열음이 평소와 달랐다. 늘 보던 낡은 전공 서적의 둔탁함 대신, 날카롭고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표지에 광택이 흐르는, 서점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 책이었다.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책을 반대편으로 밀어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것이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유일한 신호였다. 나는 라면을 입에 넣었다. 평소라면 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침묵을 메워주었겠지만, 그날따라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소리를 죽여 씹었다. 그가 젓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형광등 불빛이 매끄러운 책 표지에 반사되어 눈이 아팠다. 그는 책을 치우지 않은 채 라면을 먹었다. 책과 냄비 사이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 보였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냄비를 조금 안쪽으로 밀었다. 그가 책을 더 안쪽으로 옮겼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지만, 간격은 계속 수정되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우리 사이의 무게 중심이 조금 어긋나기 시작했다. 2월의 대학가는 텅 빈 껍질처럼 보였다. 강의가 끝난 건물 앞에는 버려진 책상과 매트리스가 쌓였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이삿짐 트럭이 골목을 막아섰다.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는 얼굴들이 차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흐름에서 특별히 예외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그가 사는 반지하를 하나의 주소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은 오래 머무는 집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끝내기 위해 잠시 몸을 얹어두는 장소에 가까웠다. 목적이 사라지면 기능도 함께 소멸하는 종류의 공간. 겨울을 버티는 동안만 필요했다가, 계절이 바뀌면 접혀야 하는 구조물 같은 것.
며칠 뒤부터 아래층의 소음이 달라졌다. 규칙적으로 들리던 펜 소리나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음이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찌이익―. 탁. 두꺼운 박스 테이프를 뜯어내고 끊어내는 소리였다. 드르륵, 쿵. 무거운 가구가 바닥을 긁는 소리, 무언가가 무너지고 다시 쌓이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나는 작업하던 태블릿 펜을 내려놓고 바닥을 응시했다. 그가 짐을 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그 소란은 내 방의 고요까지 침범해, 내가 긋던 선들을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다음 날, 나는 건물 앞 전봇대 아래에서 익숙한 사물들을 마주쳤다. 구청에서 발급한 '대형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채 버려진 가구들이었다. 파란색 회전의자. 등받이의 메쉬 천이 닳아 늘어진 의자였다. 내 방 침대 대신 등 뒤를 버티고 서 있었던, 그의 등이 닿았던 그 의자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녹슨 빨래 건조대. 한쪽 날개가 부러져 덜렁거리는 플라스틱 서랍장. 그리고 반쯤 남은 샴푸 통이나 낡은 슬리퍼가 담긴 투명한 종량제 봉투들. 그가 반지하에서 보낸 4년의 시간 중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 길바닥에 전시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길고양이가 봉투를 뜯어보려다 내가 다가가는 소리에 후다닥 도망쳤다. 나는 쓰레기 무덤 앞에 멈춰 섰다. 어제까지 그의 '생활'이었던 것들이 문턱을 넘자마자 '폐기물'로 분류되어 있었다. 파란 의자 위로 눈발이 덮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덮어주거나 치우지 않고 비켜 지나갔다. 나 역시 저 의자처럼, 그의 이사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가져갈 수 없는 잔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 밤, 그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가방에서 책을 꺼냈을 테지만, 그는 빈손이었다. 식탁 위에 올려둘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기 전, 마른세수를 했다. 손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와 차가운 박스 냄새가 났다. "라면 먹을래요?" 그가 물었고, 나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우리는 평소처럼 마주 앉았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책도, 문제집도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이 사라진 우리는 밥을 먹는 내내 냄비 속의 국물만 노려보았다. 그가 짐을 싸느라 피곤했는지 젓가락질이 느렸다.
"날씨가 많이 춥네요.“
그가 뜬금없이 날씨 얘기를 꺼냈다.
"응. 내일은 더 춥대.“
나도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언제 떠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더 이상 치워야 할 책은 없고, 그저 다 먹은 라면 그릇 두 개와 텅 빈 식탁의 여백만이 우리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내 옆에 누웠다. 스탠드는 켜지지 않았고, 볼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지친 짐승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숨결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내 방의 냄새도, 반지하의 냄새도 아닌, 떠날 준비를 마친 냄새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내 손바닥에 닿는 그의 등은 따뜻했다. 그 온기는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래층은 비어 있었다. 그가 잠든 사이, 나는 바닥에 귀를 대보았다. 윙윙거리던 냉장고 소리도, 가끔 들리던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원이 뽑힌 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적막이 내 척추를 타고 차갑게 기어올랐다.
그가 떠나는 날은 2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라면을 먹고, 창틀에 앉아 입김을 섞으며 담배를 피우고, 어쩌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체온을 탐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저녁은 달랐다. 오후 7시. 그가 올라왔다. 그는 짐을 들고 있었다. 바퀴 달린 커다란 은색 캐리어 하나와 빵빵하게 채워진 백팩. 그게 전부였다. 반지하에서 견딘 4년의 겨울이 고작 저 부피로 압축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현관에 짐을 내려놓았다. 바퀴가 타일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드르륵, 둔탁하게 울렸다. 그는 신발을 벗지 않았다. 운동화를 신은 채 현관 타일 위에 어정쩡하게 서서 방 안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식탁, 침대, 그리고 결로 때문에 물방울이 맺힌 창틀.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먼지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은 작별 인사라기보다는, 자신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퇴실 점검'에 가까웠다. 나는 습관처럼 냄비에 물을 올리려다 멈췄다. 그가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더 이상 나와 밥을 섞지 않겠다는 선언일까. 나는 말없이 가스 밸브를 잠갔다. 탁. 금속 밸브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 사이의 난방도 차단되었다.
그는 패딩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은색 라이터였다. 매일 밤 내 창틀 위에 놓여 있던, 우리 관계의 유일한 연결고리. 그는 그것을 쥐고 잠시 만지작거렸다. 가져갈까, 두고 갈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저 라이터를 가져간다면, 적어도 그는 나를 기억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이터를 신발장 위에 툭, 올려두었다.
“이거 누나 써요. 난 이제 진짜 끊을 거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스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쓰다가 버려요.”
그 말이 라이터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건물에서의 모든 생활을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걸까. 나라는 사람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의 찬 공기가 발목으로 훅 끼쳐왔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잠시 멈췄다. 무언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기다렸다. 미안하다는 말일까. 고마웠다는 말일까. 아니면, 서울에 오면 연락하라는 빈말일까.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등 뒤의 센서등이 꺼지는 바람에 표정이 그늘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선명했다. 망설임 없이 매끄러운 톤이었다.
"누나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 말은 설명 없이 나를 그 자리에 고정시켰다. 그가 씌운 ‘좋은 사람’이라는 말 속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규격화된 프레임 안에서는 화를 낼 수도,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도 없었다. 좋은 사람은 그래선 안 되니까. 나는 그가 씌워준 가면을 쓴 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고개를 끄덕여 그 정의에 동의함을 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소통이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쿵. 현관문이 닫혔다. 도어락이 잠기는 전자음이 띠리릭,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복도 타일을 구르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멀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아니라, 건물 밖으로, 내가 닿을 수 없는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소리였다. 더 이상 내 발바닥 밑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연기도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신발장 위에는 그가 두고 간 은색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직 그의 체온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질렀지만, 쇠는 정직하게 차가웠다.
“가스, 거의 다 됐을 거예요.”
마지막 순간 남기고 간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텅 빈 방을 울렸다. 나는 습관처럼 부싯돌에 엄지를 올렸다가, 끝내 튕기지 못하고 멈췄다. 지금 켜버리면 정말로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그 불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라이터를 켜지 않고 다시 신발장 위에,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은 버릴 수 없었다. 이후 몇 번을, 나는 그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는 일을 반복했다. 켜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확인하지 않는 일이 그때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연기는 천장 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가, 방향을 잃은 채 방 안에 머물렀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래를 내려다봤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창틀에 손을 얹은 채 잠깐 서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창문이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재떨이가 없어, 빈 컵을 하나 꺼냈다. 컵 바닥에 남아 있던 물 위로 재가 떨어졌다. 회색 가루가 물을 머금으며 천천히 풀어졌다. 나는 그 컵을 싱크대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바로 치우지 않았고, 다른 컵을 꺼내지도 않았다. 냄비에 물을 올렸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많은 양이었지만, 양을 줄이지는 않았다. 국물은 남겼고, 남은 국물은 싱크대로 흘려보냈다. 설거지는 하지 않았다. 접시는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방 안에는 이전과 다른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특별히 정리할 것도, 확인할 것도 없이.
며칠 뒤, 나는 방치해 뒀던 작업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떠난 뒤로 손도 대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감 기한이 지난 도면들이 시체처럼 널려 있었고, 지우개 가루가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덤덤하게 손을 움직였다. 널브러진 종이들을 걷어내는 손길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오류가 난 작업 환경을 리셋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반복 작업일 뿐이었다. 쓸모없는 이면지와 실패한 스케치들을 골라내 쓰레기통에 넣었다. 사각, 사각. 건조한 종이들이 구겨지는 소리만이 적막한 방을 채웠다. 파일철 사이에 끼워져 있던 트레싱지 뭉치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팔락. 종이 한 장이 책상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반투명하고 얇은 트레싱지. 평소라면 도면 위에 덧대어 가수정을 볼 때나 쓰는 종이였다. 하지만 그 위에는 선 대신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가 즐겨 쓰는 0.3mm 제도 샤프로 꾹꾹 눌러 쓴, 그러나 지우개로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흑연의 흔적이었다.
‘내년엔 같이 고양이를 키울까?’
나는 잠시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샤프심은 번지지도 않고 선명했다. 그것은 감상적인 일기라기보다는, 설계 오류가 명백한 불량 데이터에 가까웠다. 기억은 잉크보다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그가 내 등 뒤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나는 마감에 쫓겨 기계 부품의 단면도를 그리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나는 잠시 멍청한 계산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기초 조건이 비어 있는 도면 위에 혼자서만 필요한 선을 하나 더 긋고 있었다. 검토 과정에 들어갈 수도 없는 종류의 가정이었다. 바스락. 트레싱지가 건조한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고양이'가 형체도 없이 찌그러졌다.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를 마저 치우고, 무뎌진 연필을 다시 깎았다. 흑연 가루가 떨어졌다. 다시 밤이 오고 있었다. 시선이 신발장 위로 향했다. 며칠 전 그가 두고 간 은색 라이터가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에 닿았다. 이제는 확인할 시간이었다. 나는 부싯돌을 튕겼다. 틱.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가스가 다 된 줄 알았던 라이터 팁에서 파르스름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화르륵. 하지만 그것은 건강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산소가 부족해 질식해가는 듯한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불꽃은 심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마지막 남은 생명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작고 연약한 불빛을 응시했다. 그 불꽃은 내 동공 속에서 1초, 2초, 그리고 3초를 버티다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허무할 정도로 짧은 소멸이었다. 손끝에 아주 미세한 온기가 스쳤다 사라졌다. 나는 다시 한번 부싯돌을 튕겼다. 틱, 틱. 이번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비릿한 가스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방금 그 불꽃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타오르지 못한 것은 재조차 남기지 못한다. 내 안에서 발화되지 못한 비겁한 고백들처럼, 라이터는 이제 영원히 건조한 마찰음만 낼 것이다.
“가스, 거의 다 됐을 거예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바닥까지 긁어 쓰고 남은 껍데기만 내게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불 꺼진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멈췄다. 대신 책상 한구석, 연필꽂이 옆에 툭 내려놓았다. 버리는 것조차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아래층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얼음 깨지는 소리도, 책장 넘기는 소리도 더 이상 기어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스탠드를 켰다. 책상 위에는 마감 기한이 지난 기계 부품의 도면이 놓여 있었다. 나는 0.3mm 샤프를 집어 들었다. 흑연 냄새가 났다. 나는 도면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사각. 감정도, 온도도 없는 직선 하나가 종이 위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