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자 <대학>
-참고사항-
<대학>은 원래 <예기>의 42편으로 증자가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대학>에 주희의 해설을 더한 <대학장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로 고려의 불교를 내쫓고 유교를 받드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삶 곳곳에도 여전히 유교의 영향력이 남아있다. 우리가 지키는 예법이나 조상에 대한 제사, 그리고 효에 대한 강조 같은 것들이 모두 유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런 예법들을 단지 옛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 까닭은 시간이 흐르며 예에 대한 근거는 사라지고 그 형식만 남았다는 점과, 근대화가 우리의 것과는 차이가 있는 서양의 기술과 문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정말 서양의 사상이 동양의 것보다 우월할까?
동양의 사유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선 500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탐구해 온 유학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유학의 학파 중 하나인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인물은 주희다. 그는 주자라고 불리는데 그렇기에 성리학 또한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우리가 흔히 들어본 '사서삼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다. 사서삼경 중 사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논어>를 포함하여 <대학>, <맹자>, <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오늘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대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대학>은 주희의 해설에 의하면 '공부의 목적'을 다루는 책이다. 그렇기에 주희는 사서 중의 첫머리로 이 책을 놓았을 것이다. 또한 <대학>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소학>에 대조된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고등교육 기관인 university를 번역할 때 <대학>에서 그 이름을 차용하였다.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대학>의 첫 구절로써 이 책이 뜻하는 바가 적혀있다. 여기서는 글의 목적을 크게 3가지로 나누는데, 이를 삼강령이라고 한다.
첫 번째 강령은 明明德(명명덕) 즉,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다. '밝은 덕'이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내재된 본성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옳음을 추구하는 본성을 내재하여 태어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본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밝은 덕을 밝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밝은 덕을 밝혀야 할까?
그 방법을 아래의 팔조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物格而後知至
사물이 탐구된 뒤에 앎에 이르게 된다.
知至而後意誠
앎에 이른 뒤에 의지가 성실하게 된다.
意誠而後心正
의지가 성실하게 된 뒤에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
心正而後身修
마음이 올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진다.
身修而後家齊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반듯해진다.
家齊而後國治
집안이 반듯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國治而後天下平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온 세상이 태평해진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을 태평하게 하기 위한 시작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학을 비롯한 동양의 사상들은 몸을 닦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은, 스스로를 바꾸는데서 시작된다.
두 번째 강령인 親民(신민) 즉,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 또한 이 구절에 나타난다. 자신을 닦으면 집안과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은, 스스로를 바꾸었다면, 이제는 나아가 주변의 사람들을 바꿀 차례라는 것이다. 이것이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이 뜻하는 바이다. 작은 돌멩이도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자신의 변화는 세상을 향한 시작이다.
세 번째 강령인 止於至善(지어지선) 즉, 지극한 선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머무를 곳을 모른다면, 그곳에 이를 수 없다.
그렇기에 앎에 이르기 위한 공부가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며, 이것이 격물(格物)이다.
격물에서 말하는 사물은 단순히 물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모두 특정한 규칙을 가지고 변화한다. 또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도 어떠한 규칙들이 존재한다. 사물을 탐구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규칙, 이치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앎을 지극히 한다는 것이며, 선을 향한 첫걸음이다.
선을 알았다면 선에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곳에 도달해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곳을 넘어가서도 안된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 이것을 '중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중용은 산술적인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즉, 상황과 맥락에 맞추어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선악을 구분하고 머물 곳을 안다면, 이제는 선을 가까이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 앎은 머릿속에만 머물러서는 진짜 앎이라 할 수 없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말하길 진정한 앎은 실천하는 것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앎을 행동으로 이어가려는 태도가 바로 성의(誠意), 즉 의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다.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 군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혼자 있을 때에도 행동을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알고 행하는 자라면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행동이 바뀌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의지가 성실한 자와 성실하지 않은 자의 가장 큰 차이다.
의지를 성실히 한 후에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심(正心)이다.
마음이 바르다는 것은 마음이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에 기쁨, 슬픔, 분노, 우환과 같은 감정을 싣게 되면 마음은 기울어진다. 그러니 마음을 중용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마음이 치우치면 몸 역시도 기울게 된다. 그러니 마음을 가지런히 한 후에야 몸이 바르게 된다.
몸을 닦는다는 뜻의 수신(修身)은 이를 뜻한다.
<대학장구> 전 8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좋아하는 대상에게서 그 단점을 발견하고, 싫어하는 대상에게서 그 장점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다.
제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은 있고, 제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장점이 있다. 그러니 '좋음'과 '나쁨'이라는 틀에 얽매여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나를 닦았다면, 이제 너를 향해야 한다. 우선, 가장 작은 공동체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
이것이 제가(齊家)다.
작은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일을 하겠는가. 그러니 작은 일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집안을 가지런히 한 후에는 더욱 큰 곳으로 나아가야 하니, 다음은 나라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치국(治國)이라 한다.
나라를 다스린 후에는 천하가 평탄해지니, 이것이 평천하(平天下)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명덕도 밝힐 수 있게 한다.
덕을 밝힘은 근본이며, 백성을 새롭게 함은 말단이다. 그리고 그 본말은 지극한 선의 머무름 위에서 새워진다. 유교의 시작인 공자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듯이, 유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공부의 목적은 결국 앎을 통한 실천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더라도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야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는 무엇이 선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역사가 증명해 왔듯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대학>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공자도 말했듯이 현대에는 현대의 예를 따라야 한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 그러니 옛날의 것을 무작정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적절한 때에는 적절한 예가 필요하다.
<대학>을 살펴보며 동양의 사유들 역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서양의 기술들이 우리 삶에 많은 편의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서양의 개인주의적 사상은 개개인에게 자유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자유와 편의가 늘어날수록, 갈 수 있는 방향이 많아질수록,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찰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방향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렀을 때 비로소 보인다.
詩云 "緡蠻 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 而不如鳥乎?"
<시경>에 "지저귀는 꾀꼬리는 수풀이 우거진 산모퉁이에 머무는구나!"라는 노래를 듣고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머물러야 될 시기에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구나. 사람이면서 새만 못해서야 되겠는가!"
-참고문헌-
<대학/중용> 주희 엮음, 김미영 옮김, 홍익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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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