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넘어 흐르는 하나의 숨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신라시대 문인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 서문에 적힌 내용이다. 풍류는 직역하면 '흐르는 바람'이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단순히 바람을 지칭하는데 쓰지 않는다.
흔히 풍류를 즐긴다고들 말한다. 풍류라 하면, 바람결에 흩날리는 노랫소리나 봄날의 산수화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 풍류를 ‘나라의 현묘한 도’라 했다. 그가 보기에 풍류란 단순한 멋을 넘어, 삶을 꿰는 정신이었다.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풍류의 의미와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시작점을 고조선으로 삼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고조선은 정말 까마득히 먼 옛날에 새워진 나라다. 당장 우리에게 익숙한 고구려, 백제, 신라도 세워진지 2천 년이 넘었다. 왜 고대의 국가들을 우리의 조상이라 부르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들과 이어지게 하는가.
단순히 사는 곳이 같았고, 그들과 핏줄이 같았기 때문일까? 인간의 조상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우리와 먼 친척이고 조상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구분한다. 지리와 언어와 생활양식 등에 따라서, 동양과 서양, 나아가 같은 동북아시아에서도 중국, 북한, 일본을 구분한다.
무엇이 그 '구분'을 만들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화가 아닐까 싶다. 문화는 지리, 역사, 언어, 생활상을 모두 포함하며, 시대에 따라 계승되는 통합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전의 것을 일부 남겨두며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변화하면, 결국 처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문화가 남을 것이다.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테세우스의 배는 부품을 계속해서 바꿔나가 결국 처음 그 배를 구성한 부분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그 배는 처음 배와 같다고 말할 수 있냐는 오래된 질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생각을 말하자면, 당연히 다른 배다. 같은 부분이 없는데 어떻게 같은 배라 말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우리는 처음 배든 나중 배든 똑같이 테세우스의 배라고 말한다. 분명 다른데도 말이다. 좀 더 일상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보자. 우리 몸의 세포는 끝없이 분열하며, 결국 나중에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만 남는다. 그럼 그건 내가 아닌가? 아니다, 여전히 나다.
이 말은 단순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연속적이며, 의미를 유지시키는 무언가가.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아'라고 부른다. 자아는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계속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계승되는 '자아'는 무엇인가? 겉모습은 바뀌어도 여전히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어떤 본질 말이다.
이를 풍류라 한다. 풍류는 우리 민족의 내면화된 정신세계이자, 우리를 우리로 엮어주는 '자아'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자아인 이 '풍류'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다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으로 돌아가 보자.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이어지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設敎之源
그 가르침을 창설한 내력은
備詳仙史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實乃包含三
실로 곧 삼교를 포함하여
接化羣生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최치원은 풍류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모두 포괄한다고 본다. 풍류는 서로 다른 길을 하나로 모으는 회통의 정신이며, 조화의 도였다
삼교를 포함하는 풍류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삼교가 더해져 풍류를 이룬다는 해석과, 풍류가 삼교라는 세 얼굴로 드러났다는 해석이다. 풍류 연구에 힘썼던 범부 김정설은 후자를 주장한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풍류라 불리는 현묘한 도가 있었으며, 삼교는 그 정신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최치원이 살던 신라시대에는 이 풍류의 정신이 화랑도로 구체화되었었다. 화랑들은 서로 도의를 닦으며(相磨道義), 음악과 춤을 즐기고(相悅歌樂), 산수 좋은 곳을 노닐었다(遊娛山水). 또한 화랑들이 지켜야 할 계율은 세속오계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에는 효(事親以孝)와 충(事君以忠), 그리고 살생을 삼가고 생명을 존중할 것(殺生有擇) 등 삼교에서 강조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의 화랑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풍류가 단순히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악, 자연, 윤리와 같은 모든 것을 아우르며 그것들을 두루 통한다는 것이다.
풍류에 대해 김범부는 '멋'이라고 조금 더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지금의 '멋'과 최치원의 '현묘한 도'가 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말이란 것은 시대에 따라 계속 그 뜻이 변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풍류와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현대와 과거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과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었던 것들의 실체를 밝혀주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분석하고, 미신적 설명을 대체했으며, 자아와 주체성에 대한 재고를 유발했다.
우리는 이제 악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번개가 제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을 안다. 이러한 일종의 '신비'들이 오해와 착각이었음을 안다. 이런 경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와 같은 신비들은 사람들을 공통적으로 아울러주는 조화의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삭막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똑똑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풍류의 의미도 점점 풍화되고 있다. 사회의 수많은 갈등들은 조화의 바람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람이 불 때에야 비로소 깃발은 그 모습이 온전해진다. 풍류는 본래 ‘흐르는 바람’이었다. 이제 그 바람이 다시 우리 사회를 스쳐야 한다.
[참고문헌]
<역사 속의 한국철학>, 이종성,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풍류도의 현대적 계승, ‘참 멋’의 인간관으로 -범부 김정설의 풍류도적 음악관을 중심으로", 박정련,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9